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3일

제1회 월드컵 우루과이서 개막

산풀내음 2017. 6. 6. 19:42

19307 13,

1회 월드컵 우루과이서 개막

 

영국에서 시작된 축구는 유럽 열강들이 전 세계로 식민지를 확장시키던 정복의 시대에 영국의 식민지 확장과 함께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에 더하여 영국과 경쟁하던 다른 열강들도 축구를 받아 들여 나름대로 발전 및 전파에 기여하였다. 공 하나와 뛰어다닐 수 있는 운동장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축구는 19세기 후반에 이미 여러 국가들이 나름대로 협회를 조직하고 국제적인 경기도 열 정도가 되었다. 국가 간 경기는 각국이 협력해 통일된 규칙을 제정할 필요성을 낳았다.

 

이러한 시대 요구에 대해 1904 5 21일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 7개국(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의 주도로 국제축구연맹(FIFA, 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이 창설되었다.

 

18th FIFA Congress, Barcelona 1929

 

세계의 진정한 챔피언을 가리고자 하는 니즈는 있었지만 초대 회장 로베르 게링, 2대 회장 다니엘 울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축구 대회의 개최는 적절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각 국가들 간의 협회 조직이 허술했고, 규칙 또한 통일되지 않았으며 축구 경기가 열리기 위해서 필요한 경비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홍역을 치르면서 세계적인 축구 대회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도 축구는 계속 발전했다. 비록 전쟁 기간이었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세계는 축구를 즐겼다. 비공식 휴전이 실시된 1914년 크리스마스에는 영국과 독일군이 축구 대결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된 병사들에게 축구공이 보급되면서 수용소에서 공을 차는 포로들을 자주 보게 되었다. 이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축구는 자연스럽게 세계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다시금 세계적인 축구대회 개최의 움직임이 FIFA에서 일어났으나 당시에는 전쟁을 겪은 국가들 간 적대감정 때문에 이것이 쉽지는 않았다.

 

1920 5 26일에 독자적인 축구대회 개최계획을 발표하였고, 1921년 프랑스의 줄리메(Jules Rimet, 1873-1956)가 제3 FIFA 회장에 취임하면서 세계대회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당시 올림픽에 축구가 있었지만 순수 아마추어 참가에 집중하는 올림픽 축구란 속성상 우승팀이 진정한 챔피언이라는 공식은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이미 당시에 몇몇 국가에서 프로리그가 진행되고 있었고, 올림픽에는 최고 수준이 아닌 팀이 참가하거나 프로를 아마추어로 속이고 참가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리고 축구는 올림픽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줄리메

 

이에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유럽의 참가국 수가 줄기 시작했고, 국제축구연맹(FIFA)은 세계 최고 선수들이 자웅을 겨루는 대회의 필요성을 느끼며 이른바 축구의 세계선수권대회 개최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FIFA의 앙리 드로네 사무총장은 "프로축구가 뿌리 내린 많은 나라가 그들의 최강 팀을 올림픽에 출전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이제 축구는 올림픽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축구와 올림픽의 분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1928년 암스테르담 총회에서 줄리메의 오른팔 앙리 도로네 사무총장은 “아마추어만의 경기인 올림픽에 각국은 최우수 선수를 보내지 않고 있다. 아마와 프로에 관계없이 진정한 세계 챔피언을 뽑는 대회를 개최해야 할 때가 왔다”고 역설했다. 이 주장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5 26일 총회에서 제1회 월드컵을 2년 후인 1930년에, 그 다음부터는 4년에 한번씩 올림픽이 쉬는 해에 개최할 것을 25 5로 가결했다.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은 당시에 이미 축구가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종목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30 FIFA 가맹국은 41개국으로 증가했으며 국내 경기나 국제 경기의 숫자와 관중이 늘어나고 있었다.

 

1회 대회 개최를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헝가리, 스웨덴 등이 희망했지만 FIFA 1929 5 18일 바르셀로나총회에서 남미의 우루과이를 선택했다. 당시 유럽으로부터 정치나 문화면에서 무시당해 온 남미는 축구를 통해서 유럽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서서히 얻어가고 있었다. 그 선두 주자가 남미의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였다. 우루과이는 1924년과 1928년에 연속으로 올림픽 축구 종목에 우승하며 세계의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다. 아마추어 챔피언인 우루과이는 뛰어난 실력에다 국가의 후원에 힘입어 다른 어느 국가들보다 열성적으로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제1회 월드컵이 개최되는 1930년이 우루과이 건국 100주년이며, 월드컵 개최를 위해 스타디움의 신설과 참가국들의 경비를 부담할 각오가 되어있다고 주장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도 우루과이의 개최를 도울 정도로 남미의 모든 국가가 제1회 월드컵의 우루과이 개최를 희망했다. 개최국이 참가 팀의 여비와 체제비를 부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은 다른 경쟁 국가들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개최를 희망했던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이 입후보를 취소했고 우루과이가 첫 월드컵의 개최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1회 월드컵이 치러지는 1930년 우루과이가 개최를 위해서 열심히 스타디움을 건설하기 시작했을 때, FIFA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개최권 획득에 실패한 유럽의 강호들이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대회 개최 2달 전까지, 전후(戰後)의 복구사업, 대공황, 우루과이까지의 먼 거리, 그리고 당시 우수한 선수들을 2달씩이나 내어줄 수 없다는 프로축구클럽들의 저항 등으로 유럽에서는 한 나라도 참가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후 FIFA 회장인 프랑스의 줄 리메(Jules Rimet)가 적극 교섭에 나선 결과 유럽 4개국(프랑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벨기에)이 참여하기로 했고, 전체 참가국 13개국은 지역별 예선전 없이 초청형식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참가한 유럽의 4개국은 당시에 유럽에서는 2류 정도로 여겨졌던 팀들이었다.

 

우루과이 월드컵은 유럽 네 팀, 남미 여덟 팀과 미국 대표팀 등 모두 1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30 7 13일 몬테비데오에서 막을 올렸다. 주경기장이 미처 완공되지 않아 보조 경기장에서 개막식을 가졌고, 개막 5일 뒤에야 주경기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원래 첫 경기는 개최국 차지였으나, 프랑스 혁명기념일을 맞아 프랑스와 멕시코전을 개막 경기로 열었다. 13개국이 4개조로 나누어 3개 경기장에서 리그전을 치렀으며 각 조에서 1위를 차지한 4팀은 준결승에 진출하여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을 가렸다.

 

1회 월드컵 대회는 많은 사람들이 남미의 독무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유럽 대표팀들도 이에 굴하지 않고 좋은 경기를 펼쳤다. 특히 프랑스는 멕시코를 4-1로 꺾었으며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대 접전 끝에 1-0의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이 경기에서는 주심이 실수로 경기 종료 휘슬을 6분 일찍 불어 버렸는데, 격렬한 항의를 받고 선수들을 다시 불러 경기를 속개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선수들 중에는 샤워를 하던 중 다시 불려 나온 이들도 있었다.

 

주최국 우루과이는 강호들을 연달아 격파한 뒤 결승에서 아르헨티나와 만났다.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펼친 끝에 4-2로 승리, 결국 줄 리메 FIFA 회장이 높이 30cm, 무게 4 kg인 금으로 만든 `줄 리메컵`을 우루과이팀 주장 호세 나사지에게 수여했다. 이로써 우루과이가 `줄 리메컵`의 첫 주인이 됐다. 열광과 환희가 우루과이 전역을 휩쓸었고 이튿날은 공휴일로 선포됐다.

 

World Cup 1930: Uruguay vs. Argentina 


Members of the the Uruguayan team celebrate after Winning the Jules Rimet trophy

World Champion 1930 Uruguay with the famous T-Model ball

In this photo, Frenchman Jules Rimet (L), head of FIFA hands over the World Cup trophy to Dr Raul Jude,  the president of the Uruguayan Football Association, after Uruguay beat Argentina 4-2 in a spectacular fashion in Montevideo, Uruguay on July 30, 1930.

 

자신들의 지원으로 브라질로부터 독립한 우루과이에게 첫 월드컵 우승의 영광을 빼앗긴 아르헨티나는 분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자국에 있는 우루과이 대사관을 때려 부수는 등의 폭동을 일으켰으며 우루과이와는 1년 정도 단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우루과이는 다음 월드컵이탈리아에서 개최되자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 유럽 국가들이 대거 불참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불참한다. 18개 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 관중은 43 4500, 평균관중은 2 4139, 총득점은 70, 경기당 평균득점은 3.88점이다.

 

월드컵 트로피는 누가 만들었을까? FIFA가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를 개최키로 결정한 후, 프랑스 조각가인 아베르 사프(Abel LaFleur)는 우승팀에게 시상할 순금 트로피를 제작했다. 승리의 여신이 팔을 뻗쳐 팔각형 모양의 컵을 받들고 있는 조각품이었다지난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한 브라질의 3회 우승 업적을 기리어 브라질에 영구 수여된 이 트로피는 현재는 월드컵을 위해 헌신했던 줄리메 회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줄리메컵'으로 불리고 있다.

 

줄리메컵은 수차례 도난과 분실을 반복하면서 현재는 원본 대신 복제품이 소장되어 있다. 2차 대전 중 침략군을 피해 이탈리아의 한 가옥 침대 밑에 숨겨지기도 했고, 1966년 월드컵에서는 대회 직전에 도난당하기도 했다. 이후 트로피는 1983년 브라질에서 다시 도둑을 맞았는데, 이후 행방을 찾지 못한 채 도둑들이 순금인 트로피를 팔아 없앴을 것이란 추측만 하고 있다.

 

 




'역사속에 오늘, 7월 > 7월 13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서울대안 발표와 반대운동  (0) 2017.06.06
조선체육회 창립  (0) 2017.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