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7일

러시아 10월 혁명 발생

산풀내음 2016. 10. 13. 04:42

191711 7,

러시아 10월 혁명 발생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는 영국 및 프랑스와 함께 3국 협상 측에 가담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하여 참전했지만 동부전선에서 독일에게 거듭 패하게 되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대전 중 차르의 계속된 동원령, 가축의 징발로 농업은 황폐화되고, 군수공업의 강화로 인한 생필품의 감산, 도시의 식량 ·연료사정 악화는 대도시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915년 여름 카데트(입헌민주당)를 중심으로진보 블럭이 결성되어 정부의 실정, 전쟁 수행상의 실책에 대해 엄한 비판이 가해졌다. 1916년에는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지만 라스푸틴에 심취한 황비 알렉산드라니콜라이 2는 여전히 전제(專制)를 고집하고 개혁을 생각하지 않았다.

 

1911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 니콜라이 2세는 로마노프 왕조 14번째 군주1917 혁명으로 퇴위했으며, 1918 총살당했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1,33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2월 중순부터 수도 페트로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인하여 수도지구 사령관 카발로프 장군은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3 8(러시아 구력 2 23) 일요일이었던 그 날, 영하 20 ℃ 의 추위에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던 시민들에게 식량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 떨어지자 시민들은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러시아의 수도에서 La Marseillaise(프랑스 혁명 노래, , 佛국가)가 불리고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구호는 ‘빵을 달라!’에서 ‘전제 체제 타도!’로 변화되었고 군인과 경찰들도 시위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전장에서 그 소식을 접한 니콜라이 2세는 ‘내일까지 진압하라.’라는 전보를 보냈지만 수도 방위를 맡고 있던 카발로프 장군은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시위대에 가담했다.

 


2월 혁명

 

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이날 두마(국회) 지도자들은 12명으로 임시위원회를 구성, 군주제를 살리는 길은 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길이라 판단하고 군부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결정하였다.

니콜라이 2세도 이를 받아들여, 3 15일 동생인 미카엘 대공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그러나 양위를 받은 미카엘 대공은 앞으로 구성될 제헌의회에 의해 추대되지 않는 한 제위를 계승할 뜻이 없다고 밝혀, 결국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3 15일 구성됨으로써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4년 동안 제정일치 사회였던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왕조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것이 소위 2월 혁명이다.

 

2월 혁명 후 정치권력을 잡은 러시아임시 정부는 전쟁을 계속 수행하면서 대중의 불만은 놓아져 갔다. 즉 러시아는 지주-부르조아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망명중인 스위스로부터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1870-1924)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등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내에서 소수파인 볼셰비키였지만 꾸준히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6 18일 임시정부가 행한 독일공격의 실패로 반정부열기가 높아지자, 7 3일 볼셰비키는 수도의 군대와 노동자들의 무장시위운동을 조직하였다. 정부는 7 5일 전선으로부터 군대를 소환하여 이를 진압하고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어 급진적인 노동자, 병사, 볼셰비키에 탄압을 가하게 되자 이들과 정부 간의 대립은 첨예화하였다.

레닌은 탄압을 피하여 한때 핀란드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강력한 요청 아래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되었다.

 

레닌(중간)과 트로츠키()와 스탈린()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케렌스키, 볼세비키에 의한 10 혁명  핀란드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고, 1939 제2 세계 대전이 터지자 나치 독일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정착했다. 향년 89세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11 6(러시아 구력 10 23) 새벽2, 임시정부 수상 케렌스키(1881-1970)가 볼셰비키 신문 인쇄소를 봉쇄하자 트로츠키는 전 부대에 무장봉기를 명령했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적위대가 전화국, 정부청사 등 주요 거점을 무혈 점거했다. 그날 밤 열린 제2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이미 대세는 다수파인 멘셰비키에서 소수파인 볼셰비키로 기울어 있었다.

 

곧이어 2차 소비에트 대회가 끝난 11 7(러시아 구력 10 25) 오전 10, 트로츠키 (1879-1940)를 위원장으로 하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블라드미르 일리치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마침내 11 8일 새벽2시 동궁이 함락되자 소비에트 대회장은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다. 오전 6,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레닌이 기초한 대회선언이 낭독됐다. 하룻밤 사이에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 것이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농민의 정부'가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의회민주주의를 심어보려는 많은 사람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이 타도한 황제보다도 훨씬 무자비한 공산당의 독재가 수립되어 70여 년이 지나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됐다.


10월 혁명 당시 연설하는 레닌


10월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