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0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산풀내음 2017. 3. 4. 20:31

1997 4 20,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전 북한노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씨(1923 2월 17 ~ 2010 10월 10) 1997 4 20일 서울에 도착했다. 지난 2 12일 베이징주재 우리 대사관에 귀순한 지 67일 만이며, 경유국인 필리핀으로 옮긴 지 33일 만이었다. 황씨는 도착 직후 공항에서 발표한서울도착 인사말씀을 통해나의 청원을 허락해 주고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 준 대한민국정부와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황씨는북조선은 사회주의와 현대판 봉건주의, 군국주의가 뒤섞인 기형적 체제로 변질됐으며 경제는 마비상태에 들어갔다면서수십년간 북조선 당국의 고위 간부로서 고민은 비길 데 없이 심각했으나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다 합쳐도 7천만 우리 민족의 생사운명과 바꿀 수 없다는 양심의 명령, 그리고 남쪽 형제들과 손잡고 전쟁을 막아 보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돼 대한민국에 오게 됐다고 귀순 동기를 밝혔다. 황씨의 이날 서울행에는 필리핀 보안당국의 호송책임자인 리바르네스 준장이 동행, 공항에서 황장엽과 김덕홍 두 사람의 신병을 우리 측에 인계했다.

 



 

황장엽은 1923 2 17일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본의 중앙대학교 법과를 나와 소련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유학하였다. 그는 평양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교의 총장과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1984 4월부터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역임했고, 1993 12월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으며 학자로서의 그의 위상과 정치적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 1984 2월에 그는 당의 국제부 요원들도 외교일꾼이므로 사교춤정도는 알아야한다고 간부들과 젊은 여성들을 동원하여 매일 밤 난잡한 춤판을 벌였다가 당 조직부의 비판을 받고 해임되었다. 1 6개월간 평남 덕천탄광에서 <혁명화교양>이란 명목으로 중노동을 하다가 김일성의 딸 김경희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 1985 8월에 당 국제부에 복직하고 1988 12월에는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1990 5월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발탁되고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되었다. 1990 9월에는 북일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에서 조선노동당과 일본자민당과 사회당의 3당공동선언을 이끌어낸 북한 측 주역을 했으며, 1992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아놀드 캔터 국무부차관과 미북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1992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이 되었고 1992 12월에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면서, 1991 5월에 허담이 사망해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대남담당비서가 되었다. 1993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94 6월에는 김영삼 김일성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으로 남한의 통일부총리 이홍구와 만났다.

 

왼쪽에서 두번째


 

학자풍의 황장엽은 유독 김용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김용순을 버릇없고 건방진 사람으로 취급했고, 김용순은 황장엽을 거만하고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생각했다. 황장엽과 김용순은 11세의 나이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이며, 당의 국제담당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직을 역임한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용순은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술 잘 마시는 사교적 인물이었으며 성격도 원만하고 친절하여 대인관계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 사생활에서는 김정일과 손발이 척척 맞는 패거리였고, 기쁨조 파티에는 거의 빠지는 일이 없는 단골손님이었다. 공무에서도 김정일의 비위를 아주 잘 맞추는 김용순을 간부들 사이에서는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그를 <아첨꾼>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김용순은 체질적으로 바람기가 있었으며 숱한 염문을 퍼뜨린 사람이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 사이에 오랫동안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이혼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당시 김용순은 김경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지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장엽은 김일성에게 고하여 김용순을 질책하고 근신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이 황장엽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김용순과 김경희는 황장엽에게 애를 먹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워낙 깔끔하고 빈틈이 없는 황장엽에게는 걸고넘어질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 7 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황장엽은 자기를 신임하던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공허했고 김정일의 통치스타일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외감을 느낀 황장엽은 주체사상 창달과 전파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하던 중, 모스크바 주체사상 강연회에 가서 심혈을 기울인 강연과 토론에서 많은 교수와 학자와 학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위대한 주체사상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이 사실을 파악한 김용순은 김경희와 합세하여 김정일에게 황장엽을 거세할 것을 건의하였다. 김정일은 주체사상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가 제창한 철학이며 통치이론이지 어째서 황장엽의 학설이 될 수 있는가? 황장엽은 일개 학자로서 우리 아버지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한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위대한 수령을 모독했으며 그분의 명예를 가로챈 반역자이다라고 하면서 황장엽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그를 숙청하기위해 더 결정적인 약점을 노리고 있을 때, 황장엽은 위기감을 느껴 남한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1997 2 12일에 그 결심을 결행하였다.

 

황장엽 사후인 2013년에 밣혀진 사실에 따르면, 황장엽은 아들 황경모와 함께 1996년도경에 김정일 제거 계획을 세웠다. 당시 황 전비서는 봉건적 세습 체제에 환멸을 느껴 계획을 세운 것이며 장성택(김정일의 매형이자 황장엽과는 사돈지간, 황장엽의 아들인 황경모가 장성택의 형인 장성우의 딸과 결혼)과 서관희 농업상(1997년 식량난이 극심할 때 농업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미국 간첩 혐의로 총살) 등도 이 계획에 동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황경모는 김정일의 신변을 경호해 온 호위총국 내부의 인맥을 동원해 김정일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계획을 본격 실행하기도 전에 국가안전보위부의 감시망이 좁혀오는 것을 직감한 황 전 비서는 아들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중국 베이징에서 서둘러 망명을 단행했다.

 

황장엽는 1997130일 마지막으로 평양을 떠날 때 그 곳에 부인 박승옥 씨 및 아들 경모 씨 내외와 손자들, 그리고 딸을 남겨 두었다. 고인은 일본 방문을 위해 이날 가족을 남겨두고 평양을 떠날 때 부인에게도 탈북할 생각을 알리지 않고 떠나는 심경을 2006년 서울에서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그의 회고록(回顧錄) 15쪽에서 31쪽에 걸쳐서 애절하게 적어 놓았었다. 그러나, 그가 북한 땅에 남겨두었던 가족들에게 닥쳐 온 운명은 비참한 것이었다.

 

황장엽의 탈북이 이루어진 뒤 그의 가족들에게는 즉각 자택 연금(軟禁)의 조치가 취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1997년 중반부터 2회에 걸쳐서 '국제인권기구'(구체적으로 어떤 국제인권기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음) 조사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고 황 씨 가족을 면담했고 그로 인한 것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북한 당국은 1998년 후반까지 고 황 씨 가족을 그들의 자택에서 연금한 상태에서 엄중한 감시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간 중 부인 박승옥 씨는 이른 아침 집 근처에 있는 김일성(金日成) 동상의 대석(臺石) 청소를 하는 생활을 매일 반복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아들 황경모 씨가 탈북을 시도하다가 실패함으로써 끝장이 났다. 황경모는 황장엽 탈불 이후 장성택의 형의 딸인 부인과 강제로 이혼을 당한 상태였다. 황경모는 1998년 여름 그의 친구 한 명과 탈북을 목적으로 평양을 떠났다. 공안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도보(徒步)로 평양을 떠난 그들은 2주일 후 평북 용천 근처에서 공안 당국에 체포되었다. 체포되었을 때 그는 98천 달러의 미화 현금을 지참하고 있었고 동행했던 그의 친구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평양으로 압송된 황경모는 그의 어머니 박승옥와 함께 1999년 총살되었고 황장엽의 딸과 황경모의 두 아들은 14호 수용소로 끌려 간 것이 북에 남겨졌던 황장엽 가족의 마지막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