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0일

독일 적군파 해체 선언

산풀내음 2017. 3. 4. 20:39

1998 4 20,

독일 적군파 해체 선언

 

독일 극좌 테러단체로 한때 악명을 떨쳤던 독일 적군파(RAF, Rote Armee Fraktion) 1998 4 20일 로이터통신에 보낸 서한에서 "오늘로서 우리의 과업을 종료한다. 도시게릴라 형태로서의 적군파는 이제 역사가 됐다"고 자진 해산을 선언했다.

 

1968 4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시위 도중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와 구둔 엔슬린(Gurdun Ensslin)이 백화점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단순히 과격시위 정도로 여겼다.

1970 5 4일 여류 저널리스트 울리케 마인호프(Ulrike Meinhof)가 당시 3년형을 언도 받고 구금되어 있던 바더를 인터뷰하게 된다. 그런데, 인터뷰 당일 마인호프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그 자리에서 사법 재판관 1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법정 관리인들을 위협하여 바더를 탈옥시킨다. 바더가 탈출한 이 날을 독일 적군파의 탄생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탈주에 성공한 이들은 곧 동독의 비호를 받아 동베를린을 거쳐 요르단에 잠입, 팔레스타인 해방군으로부터 본격적인 무장투쟁훈련을 받는다. 이들 창립멤버에는 두뇌 역할을 하던 변호사 호스트 말러(Horst Mahler)도 있었다. 그는 동독에서 건너온 사회주의자로 이미 운동권 출신 수감자들의 전문 변호사로 유명했다.

 

Andreas Baader and lover Gudrun Ensslin

Ulrike Meinhof 

Former solicitor Horst Mahler after being acquitted of freeing arrested terrorists. With him are Irene Goergens, left, and Ingrid Schubert, centre, members of the East German underground organisation the Baader-Meinhof Group.

 

전후 독일 세대들은 나찌 공법자와 위선자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부모세대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다. 나찌시대 사형판결을 내렸던 당시의 판검사들이 법정에, 나찌시대 사장들이 기업에, 나찌시대 관료들이 관청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로써 젊은 세대들에게는 파시즘에 물들었던 사회가 거의 아무런 과거와의 단절없이 그대로 민주주의로 이행되고 있는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그를 비판하게 된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이름을 걸고 베트남 민중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었고, 네이팜탄으로 무장한 미군의 무자비한 융단폭격은 독인 전역의 좌파들에게 저항과 분노를 일으킨다.

 

이런 가운데 1968 2사회주의 독일 학생연맹(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는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제3세계 해방투쟁에 대한 지지와 제국주의에 투쟁하는 제2의 전선의 필요성을 결의하였다. 이런 투쟁에는 혁명적 폭력의 사용도 포함되었다.

 

60년대 후반에 발생한 두 사건은 이런 분위기를 본격적인 저항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67 6 2일 페르시아의 독재정권의 국가원수가 베를린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반대시위를 하던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그리고 채 1년도 안지나 1968 4 10일 언론 재벌 악셀 스프링그(Axel Springer)사의 선동에 자극받은 한 우익 화가가 독일 학생연맹의 의장인 루디 두츠케(Rudi Dutschke)를 저격하여 중태에 빠뜨리게 된다. 이후 광범위한 장외 가두투쟁이 일어났고 1968년 말을 기해 그 한계에 직면하게 되면서 독일의 저항세력들은 다양한 조직들로 분열되어 나갔다.

 

1967년 가두시위 도중 베를린 자유대학 로만어과 운동권 학생인 Benno Ohnesorg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사망

 

독일 적군파는 이런 상황에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을 거부한 소수의 급진좌파들이 결성했다. 창설 주역인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의 이름을 따 `바더마인호프 그룹`이라고 불리기도 한 독일 적군파는 마오쩌둥주의에 따른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 목표였다. 마인호프는 함부르크 좌익계 잡지에서 활약했던 여성 저널리스트였고, 바더는 중산층 가정 출신의 직업운동가였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급진파인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과 제휴해 각종 기술과 장비를 공급받았고 나중에는 일본적군파와 연대해 RAF로 개칭했다.

 

이들은 `나치 잔재 척결` `베트남전 반대` `반제국주의 전쟁` 등을 기치로 내걸고 1998 4월 테러활동 중단을 선언할때까지 독일주둔 미군시설 및 병력, 경제인, 법조인 등을 주목표로 수많은 테러를 자행, 30여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1977년에 악명을 떨쳤는데 1977 4 7일에는 검찰총장을 암살하고 7 30일에는 드레스너 폰트 은행장을 사살했으며 9 5일에는 슐라이어 독일경영자연맹 회장을 납치했다. 슐라이어는 나중에 프랑스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1977 11월에는 팔레스타인 테러범들과 연계해 승객 91명을 태우고 소말리아로 가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공중납치해 적군파 요원 11명의 석방을 요구하다 기장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후 잠시 숨을 고른 적군파는 1989년 독일 지멘스사 경영자의 승용차를 폭파해 사망케 하고, 1991 4월에는 동독 산업민영화 책임자 로베더를 암살함으로써 건재를 과시했지만 이후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군파에 의한 희생자는 없었다.

 



1977년 서독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 사건

 

바더와 마인호프를 포함한 RAF의 핵심인물들은 1972 6월과 7월에 체포되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 투쟁이 더욱 과격해져 테러조직으로 표류하게 된다. 울리히 마인호프는 1976년 감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으며, 안드레아스 바더는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 사건이 GSG-9에 의해 진압당했다는 보도를 라디오로 들은 직후 권총으로써 자살했다. 감방 내에 권총이 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안드레아스 바더의 죽음은 독일 연방헌법수호청에 의한 사형집행이라는 음모론이 있다.

 

1980년대까지도 끈질기게 테러를 감행했으나 동구라파권 몰락 후 기반을 상실하고 동독에 잠복하던 주요한 투사들도 대부분 체포당해 재판을 거쳐 교도소에 차례로 보내져 와해되었다. 극소수 잔여 세력이 프랑스벨기에에 잔류했으나 그 투사들도 1998년 언론을 이용해 해체를 정식으로 선언한다.

 

독일의 법률상 살인에는 공소시효가 없기에 지금도 바더 마인호프 소속 투사들은 수배범으로 명시되어 있고 심지어 2009년에도 바더 마인호프 투사가 살인 혐의로 체포당한 적이 있다. 독일에는 사형제도가 없기에 사형당한 바더 마인호프 투사는 없으나 대부분은 지금도 특별 격리 대상으로서 분류되어 무기수로서 교도소에서 생활하지만, 전향하거나 출소한 일부는 독일 행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으면서 일반인으로서 생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