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3일

미국 디트로이트서 사상 최대 흑인폭동(1976 Detroit Riot)

산풀내음 2017. 6. 16. 20:24

19677 23,

미국 디트로이트서 사상 최대 흑인폭동(1976 Detroit Riot)

 

미국에서 자동차 도시로 손꼽히는 디트로이트에는 남북을 가르는 8마일 로드(8 mile road)가 있다. 흑인이 1920년대 시내 중심지로 몰리자 백인은 북쪽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8마일 로드를 만들었다. 백인은 1950년대 이 길을 따라 높이 2m짜리 차단벽을 설치했다. 부유한 백인은 교외에서 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가난한 흑인은 도심에서 살면서 신세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제가 사라졌지만 흑인은 '검둥이'에 불과했고, 8마일 로드는 인종의 경계선이 되었다.

 

1942 Detroit


Detroit Race Wall on Birwood Street

Suburban homeowners in Detroit installed this sign in 1942. The legacy of housing segregation continued long afterwards, and most whites resisted fair housing measures in the years before the riot

 

도로를 경계로 쌓였던 인종 갈등은 1967 7 23일에 폭발했다. 백인 경찰이 무허가 술집을 단속하면서 흑인 손님 80여 명을 모조리 체포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항의 시위는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다. 흑인 청년은 '억압을 받는 환경을 없애려면 폭력이라도 사용해야 한다'고 외쳤다. 1992 LA폭동까지 최대 규모의 흑인폭동이었다.

 

이 폭동은 전국적 규모로 번져 동부 뉴욕에서 서부 샌프란시스코까지 그리고 북부 디트로이트와 그랜드래피즈, 또 시카고에서 남부 피닉스와 휴스턴에 이르기까지 전국 23개 도시에서 연달아 일어났다. 뉴욕시 맨해턴의 가장 번화한 5번가에서도 흑인청소년들이 7 26일 밤 상가를 파괴,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존슨 미국 대통령은 흑인폭동으로 거의 마비된 디트로이트에 41백 명의 공수부대 병력을 급파했다. 연방군이 투입된 디트로이트시는 27일 밤 저격수들과의 총격전이 그치고 폭동발생 5일만에 점차 평온을 돼 찾았다.

 

닷새 동안 계속된 폭동으로 43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체포된 시민수는 35백 여명에 달하며 방화와 약탈로 인한 피해액은 15천만 달러 이상으로 집계됐다.

 






 

당황한 미국 정부는 사회 무질서 대책 국가자문위원회(커너 위원회)를 만들었다. 커너 위원회는 1968 2 29 "미국은 두 개의 사회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흑인사회, 하나는 백인사회다. 두 사회는 분리되어 있고 불평등하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했다. 흑인 폭동의 원인은 백인 사회의 인종주의라고 못박았다. 흑인에게 눈총을 보냈던 백인 사회는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을 통해 흑인과 저소득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종 차별을 없애고 일자리창출하자." 커너 위원회 개혁안은 이상적이었지만 폭동이 잠잠해지자 정치권은 모른 척했다. 백인은 흑인 폭동을 계기로 서둘러 디트로이트에서 벗어났고, 일본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자동차 산업은 점점 쇠퇴했다. 흑인만 남은 도심 한복판에 인종차별은 사라졌지만 일자리는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