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9일

국회 특별위, 중석불(重石弗) 사건 조사결과 발표

산풀내음 2017. 6. 18. 21:45

19527 29,

국회 특별위, 중석불(重石弗) 사건 조사결과 발표

 

전쟁 발발 초기 이승만 정부는 잦은 정책 실패 내지는 실수를 범했다. 예컨대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점, 피난민이 가득한 한강교를 폭파해 많은 양민을 사상케 한 일, 국민방위군의 이름으로 동원된 수많은 청장년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건, 거창지역에서 민간인을 ‘통비(通匪)분자’로 몰아 학살한 사건은 모두 이승만 정부로서는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운 실책이었다. 이승만의 지지도는 날로 떨어졌다.

 

한편 1950년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 의원 정수 210명중 무소속이 126명으로 총정원의 60%를 차지하고 있었고 여당 격인 대한국민당이 24명 그리고 민주국민당이 24명 당선되었다. 따라서 제1 정당으로서 뚜렷하게 부각되는 정당이 없는 선거 결과가 나와 선거 이후 정치세력들의 이합집산을 예고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52년에 치러질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였기에, 이승만은 새로운 정당의 조직을 추진(자유당 창당, 1951 12)과 함께 1951 11 28일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정부안은 1952 1 18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쳐져 찬성 19, 반대 143, 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1952 5 25일 군대를 동원한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키고 1952 7 7일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출을 직선제로 바꾸었고, 1952 8 5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당선된다.

 

전쟁이 한창인 1952년 가을 제2대 대통령 취임식이 치뤄졌다. 천하의 개 잡놈 이승만에게는 피 흘리며 조국을 지키는 젊은이에 대한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오로지 그 넘에게는 정권의 유지를 통한 부귀영화 만이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관이었다.

 

대통령 직선제와 자유당 창당 등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고 이를 마련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 바로 중석불 사건이다. 당시 중석(텅스텐)은 우리 나라의 주요 외화 획득 자원이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중석은 탱크와 같은 군수 제조의 핵심 광물이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말면서 중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국은 1952 3 '한미중석협정'을 맺고 2년 동안 중석 15000t을 미국에 수출하기로 했다.

 


 

당시에는 달러 구하기가 매우 힘든 시기였다. 때문에 무역회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달러는 중석불, 종교불, 암달러, 원조 달러 등이 고작이었다. 중석불이란 중석(텅스텐)을 수출하고 벌어들인 달러를 말한다. 중석불은 일반에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류, 선박, 화물자동차 등 산업부흥자재를 수입하는 데만 사용하기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구경할 수 없는 돈으로 ‘은행불’ 또는 ‘정부 보유불’로 불리기도 했다. 종교불은 기독교 선교 및 전시 구호, 교회사업 등을 위해 외국에서 보내온 달러였다.

 

당시 1달러의 공정 환율은 6000원이었지만 시중 시세는 2만원이었으므로, 부적절한 자리에서 중석불 100만 달러를 불하 받으면 앉은 자리에서 140억 원의 시세 차익을 거둘 수 있는 엄청난 돈이었다. 자유당은 이러한 우리나라 외환 시장 구조를 악용하여 1952 3월 하순 재무부를 통해 대한 중석에 노동자의 양곡 도입용으로 중석불 20만 달러를 불하한 것을 시작으로 그 해 6월말까지 삼호, 미진상사, 남한무역, 영동기업, 신한산업, 보금장, 고려흥업, 남선무역 등 14개 상사에 중석불 350만 달러를 불하했다. 상사들은 불하 받은 중석불로 밀가루 9940t, 비료 1368t을 수입했다.

 

국무회의는 중석불로 구입한 밀가루와 비료, 쌀을 농림부가 지정하는 가격으로 지정된 지역의 농민과 노무자들에게 배급하기로 의결했다. 하지만 자유당 정부는 상사 측과 결탁해 도입물량의 80%를 상사가 자유 판매토록 했다. 이런 과정에서 상사들은 무려 5배가 남는 장사를 했다. 350만 달러에 달하는 중석 수출불로 수입한 쌀, 밀가루, 비료를 자유 판매하여 얻은 부당이익은 이 사건에 직접 관계된 사람의 말을 빌어도 44억 원, 일반적인 추산은 200억 원, 야당은 500억 원의 폭리를 취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반면 전쟁 중 국내시장에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의 조작으로 인해 비싼 돈을 내고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중석불 불하 대상 기업들은 당연히 정치권과 연결돼 있었고, 이들은 정부로부터 배정받은 중석불로 곡물을 수입하여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그렇게 번 돈은 다시 정치인에게 헌납되었고, 정치인은 이 돈으로 정치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이승만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중석불 사건은 부산 정치파동 직전에 불거졌고, 언급한 바와 같이 대통령 직선제와 정당 창당 등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 조성에 재무부 장관 백두진이 나선 것이었다. 백두진은 중석불 350만 달러 이외에도 기타 정부 보유 달러 120만 달러를 삼호무역, 경북과물조합 등 10개 기업에 불법 불하하였다.

 

뒤늦게 전모를 알게 된 국회는 이를 정치 쟁점화하여 1952 7 18일 정부 보유불 및 중석불에 의한 수입 양곡 비료 기타 물자 취급 사항 조사에 관한 건을 가결하고, 12명으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특별위는 열흘간의 조사 끝에 7 29일 박만순 위원장이 한국최초 정치자금 의혹사건인 `중석불 사건`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여당에서 벌인 사건이다 보니 조사는 형식적이고 미흡한 조사에 그치고 말았고, 오히려 자유당 정부는 “양곡 및 비료수급 계획상 불가피했다”고 변명까지 했다. 검찰은 마지못해 기소를 하였고 기소 내용에서 40억 원의 폭리를 취했다고 하면서도 모두 불구속으로 기소하여 세간에 의혹을 뿌렸다. 나아가 폭리 취득죄로 기소된 회사들도 1953 5월 무죄선고를 받으면서 사건은 흐지부지하게 마무리 됐다.

 

한편 인사태풍은 재무부가 아닌 농림부로 향했다. 농림부장관 함인섭, 차관 원용석, 양정국장 박 아무개 등에게 중석불 사건의 책임을 물어 줄줄이 경질되었다. 반면에 주무 부처의 재무부장관 백두진, 차관 박희현, 이재국장 최도용, 이재과장 황호영 등은 초유의 파동 속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았을뿐더러, 곧이어 줄줄이 승진하는 기쁨을 누렸다. 재무부장관 백두진은 1953년 일약 국무총리로 발탁됐다.

 

UNKRA의 원조조인식 석상의 콜터 UNKRA 단장과 백두진 국무총리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