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6일

엘비스 프레슬리 사망

산풀내음 2017. 7. 9. 17:07

19778 16,

엘비스 프레슬리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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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Y62CWd0_Eus&t=126s

 

‘팝의 제왕’,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 1월 8 ~ 1977 8월 16) 1977 8 16 43세로 사망했다. 심장병이 사인이었지만, 지나친 약물 복용으로 그의 몸은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35 1 8일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주의 투펠로에서 태어났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쌍둥이 형제는 태어나자 마자 사망했다. 그의 가족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밀주 판매로 옥살이를 한 경험이 있는 노동자였고 어머니도 단순 노동을 하는 노동자였다. 엘비스의 가족은 1948년 그의 나이 열세 살 때 테네시 주 멤피스로 이주하였는데, 이주한 곳이 흑인 거주지역이라 그는 자연스럽게 흑인 음악에 물들게 되었다. 더불어 남부지역의 백인 음악이던 컨트리와 팝 음악에도 절로 흡수되는 특별한 음악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끈적하고 격렬한 창법이나 외설적인 무대 매너는 분명 흑인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스탠더드팝 가수인 빙 크로스비나 프랭크 시내트라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2세 때 부모와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1953 6, 몇 달러를 지불하면 자작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선 레이블 스튜디오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선물하기 위해 4달러를 지불하고 두 곡이 담긴 ‘My Happiness’라는 음반을 만들었다. 이 날의 첫 레코딩은 엘비스가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선 레코드사의 사장 샘 필립스는 로큰롤을 흑인처럼 부르는 백인 가수가 필요했고, 레코딩 당시 연락처를 받아 둔 여직원의 추천으로 엘비스가 방문한지 1년 만인 1954년에 공식 데뷔 레코딩 계약을 체결한다. 필립스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윽한 눈매와 냉소적인 미소로 새로운 풍의 노래를 부르는 프레슬리에게 10대 소녀 팬들부터 녹아 들었고, 1956년 ‘핫브레이크 호텔’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면서 로큰롤은 세계적 음악이 됐다. 이후 ‘하운드 독’ ‘돈트 비 크루얼’ ‘러브 미 텐더’ 등이 연이어 히트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대가 열렸다. 1956 CBS TV더 에드 설리번 쇼에 두 번째 출연했을 때의 시청률은 무려 82.6%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그의 인기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기 절정인 당시인 1957년 말 엘비스는 징집영장을 받았고 이듬해 3월에 입대하였다. 독일 파병 기간 중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실의에 빠졌지만, 1959 9월 연회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프리실라 보리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엘비스는 군 복무 기간 중에도 ‘Hard Headed Woman’, ‘A Big Hunk O’ Love’ 등의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상의 자리는 오르기보다 지키기가 더 힘든 법. 1958년 입대해 1960 3월에 전역한 프레슬리는 슬럼프를 겪어야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비틀스를 비롯해 크림, 지미 헨드릭스, 도어스 등이 줄줄이 등장해 로큰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던 까닭이다. 30대의 나이에 그는 이미 한물간 스타로 여겨졌다.

 

대신 그는 1960년부터 1967년까지는 음악 대신 영화에 집중했다. 1956년부터 1969년까지 그는 총 31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그가 주연한 영화는 영환의 작품성보다는 섹시한 외적 매력을 앞세운 청춘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67 5 1, 엘비스는 1959년 독일에서 만난 프리실라 보리외와 결혼했다. 첫 만남 당시 14세 소녀였던 프리실라는 22세의 숙녀가 되어 엘비스의 아내가 되었다. 1968년에는 훗날 마이클 잭슨의 아내가 되는 리사 프레슬리가 태어났다.

 

 

 

 

Elvis and Priscilla Presley smile happily shortly after getting married in Las Vegas in 1967.

 

 

Elvis with wife Priscilla and their daughter, Lisa Marie in 1971. His daughter inherited

 

리사 프레슬리는 지금까지 네 차례 결혼을 한 그녀는 슬하에 쌍둥이 딸을 포함해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1988년 뮤지션인 대니 코프와 첫 결혼, 1994년 이혼 후 20일 만에 마이클 잭슨과 두 번째, 1996년 이혼 후 2000년 영화배우 니컬러스 케이지와 세 번째, 결혼 108일 만에 이혼 후 2006년 기타리스트인 마이클 록우드와 네 번째 결혼.

 

한동안 노래와 등지고 영화와 외도를 했던 그는 1968년 컴백 공연으로 재기에 성공했고, 1969 7월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4주간 총 57회의 공연을 강행하는 동안 1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1973 1월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생중계를 선보이며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한껏 뽐냈다.

 

 

 

 

그러나 위성 생중계 이후 엘비스는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1973 10 9, 프리실라와 합의 이혼하였고, 그 이후 그는 이별의 상심으로 폭식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몸무게가 74kg에서 117kg까지 불어났다. 또한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잠에서 깨기 위해 각성제를 복용하는 등 그의 몸과 정신은 병들어갔다.

 

 

 

 

 

 

결국 그는 1977 816,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 하지만 약물 남용설을 비롯해 생존설 등 온갖 추측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10년 프레슬리의 오랜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조지 니코폴로스 박사가 그의 사망원인을 변비라고 밝혀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프레슬리가 쓰러졌을 때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고 부검까지 맡았던 니코폴로스는 “1975년 치료의 일환으로 인공항문성형술을 하려 했으나 프레슬리의 자존심 때문에 수술하지 못했다”며 “그때 수술을 했더라면 그는 여전히 살아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Elvis Presley and Dr. George Nichopoulos, Dr. George Nichopoulos was infamously known to Elvis fans as "Dr. Nick" and much like Conrad Murray after Michael Jackson's death -- he came under heavy scrutiny when the king of rock 'n' roll died.

 

그러나 그의 말은 신빙성이 없다는 의견도 많다. 프레슬리에게 14가지의 약물을 처방, 검찰에 의해 약물과다 처방 혐의로 기소된 인물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죽은 엘비스의 혈액에선 총 14종류의 약물이 검출되었고, 그 가운데 10개는 심각한 양이었다. 약물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가지고 있던 엘비스가 이토록 엄청난 양의 약물을 복용할 수 있었던 건 누군가가 끊임없이 처방전을 써주었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주치의였던 니코풀로스였다. 엘비스의 죽음 이후 검시가 이뤄지고 법의학자인 마이클 베이든이 2개월에 걸쳐 꼼꼼히 조사를 한 결과, 프레슬리가 세상을 떠난 1977년의 8개월 동안 처방전을 통해 살 수 있었던 알약은 1만 개 이상이었고 이것은 모두 진정제와 마취제와 각성제(암페타민)였다. 그 기간을 2 6개월로 소급하면 엘비스는 1 9000개의 알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엔 8 15일 하루 동안 니코풀로스가 써준 처방전은 무려 8. 그는 주치의라기보다는 처방전 제조기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에 유족들은 1990년대에 재수사를 요구했고 니코풀로스를 법정에 세웠지만 사건을 맡은 검시관 조셉 데이비스는 약물보다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쪽에 더 무게를 두며, 약물이 반드시 직접적 사인은 아니라는 식으로 니코풀로스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주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생존에 빌보드 차트 10위권에 든 노래가 36곡이고, 그 중 18곡은 1위에 올랐다. 미국에서 1억장 이상, 세계적으로 10억장 이상의 음반을 팔았다. 그에게 감히 어깨를 견줄 가수는 비틀스뿐이다. 로큰롤은 1950년을 전후해 생겨난 음악 장르다. 블루스와 컨트리, 흑인 가스펠이 적당히 섞인 로큰롤은 소리를 지르는 듯한 창법이나 노골적인 성 묘사, 격렬한 춤 때문에 사회 주류층인 백인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하지만 불쾌하고 반항적인 느낌 때문인지 젊은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지금도 그가 묻혀있는 밀워키에는 하루 1만 명의 조문객이 줄을 이으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Presley graves in backyard at Graceland.

 

 

엘비스의 친딸 주장 이야기

엘비스는 1967년 5월 1일, 군복무 당시에 독일에서 만난 프리실라 보리외(Priscilla Beaulieu)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68년에 엘비스의 유일한 상속녀인 리사 프레슬리(Lisa Presley)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1973년 10월 9일, 프레슬리와 합의 이혼하였고, 1977년 8월16일 대저택 그레이스랜드(Graceland)와 당시 3억 달러라는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문학적인 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지 21년 후인 1998년에 자신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친딸이라고 주장하는 한 여인이 나타났으니, 그녀가 바로 리사 요한센(Lisa Johanse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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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5nNj_PIaV20&t=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