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5일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 발표

산풀내음 2017. 5. 1. 07:23

1947 6 5,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 발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린 이후 채 2년이 지나기도 전에 강대국들에 의한 위대한 동맹의 이상은 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탄생한 두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을 기치로 내걸고냉전을 시작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후 소련의 팽창을 목격하면서 공산주의가 더 이상 퍼져나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굳혔다. 1947 3 12일 소위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로 이어졌다. ‘자유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무장한 소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자유민들을 보호하기 위해미국이 이들 국가들에 군사지원 등 필요한 원조를 하겠다는 것이 그 핵심적 내용이었다.

 

Truman Doctrine - International Developments in the Post World War

 

트루먼은 지리적으로 양진영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공산주의의 위험이 매우 높았던 그리스와 터키를 특히 지목하여 이들 국가의 공산화는 곧 중동의 공산화를 의미하기에 이들 국가에 대한 군사원조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와 터키에 긴급군사지원금 4억 달러를 의회에 요청했고 의회가 승인함으로 이들 국가에 대한 대규모 군사원조가 시작되었다.

 

1947 3 12

 

이런 군사적 원조와 더불어 서유럽에 대해서는 경제재건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소위 마셜플랜 (또는 유럽부흥계획(ERP, European Recovery Program)라고 함)이 추진되었다. 마셜플랜은 국무장관 조지 C. 마셜 (George Catlett Marshall, 1880 12월 31 ~ 1959 10월 31) 19476 5일 하버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이 연설에서 마셜은 유럽 국가들이 재건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마련해오면 미국이 전적으로 이를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국무장관 조지 C. 마셜 (George Catlett Marshall)

 

사실 전후 유럽의 경제사정은 한 언론사가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유럽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만큼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미국이 서유럽을 방패로 공산주의 팽창을 막아내려면 우선 유럽의 이 같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럽의 경제적 위기가 계속되면 공산주의의 침투가 상대적으로 용이해질 것이고 나아가 나치와 같은 군국주의가 부활할 염려도 있었다.

 

동시에 미국의 경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인식이었다. 유럽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일어서야만 전쟁 중 빌려주었던 엄청난 액수의 빚을 일부라도 되돌려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장기적으로 미국상품의 시장확보를 위해서도 유럽의 경제발전이 필요했다.

 

After World War 2

 

마샬 플랜은 `유럽 모든 국가들에 열려있다`는 연설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반소-반공주의를 전제로 서유럽 민주국가들의 경제부흥과 통합을 목적으로 추진됐다.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이 불참한 가운데 7월에 결성된 `유럽경제협력위원회(CEEC)`에 참가한 16개국이 유럽 경제재건 안을 제출했고 여기에서 미국에 224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요청했다.

 

미 의회는 대외원조법을 통과시켜 우선 50억 달러를 긴급지원하고 추가로 120억 달러를 지원하도록 승인했다. 일부 의원들은 이 같은 엄청난 규모의 지원이 미국경제를 오히려 파탄시킬 수 있다며 원조계획에 반대했으나 1948년 체코에 공산 쿠데타가 발생하고 이탈리아 총선에서 공산당이 득세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반대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The Friendship Train In New York Before His Departure For Europe on November 1, 1947.

 

결과적으로 마셜플랜은 대성공이었다. 유럽의 산업과 농업생산이 회복됐고 재정이 안정됐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등은 이 기간 동안에 국민총생산이 15~25%까지 증가했고 화학-기계-철강 등의 산업분야가 빠르게 회복됐다. 그리고 미 유럽 간 무역도 급증했다. 유럽 국가들이 원조금의 대부분을 미국 생산설비와 물품을 사들이는데 사용했으므로 미국경제 역시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마셜플랜 시행 이후의 프랑스 직물업

England, Something for everybody.


 

마셜플랜은 유럽의 통합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네룩스 3,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서독은 유럽결제동맹을 맺고 통화, 관세 등 상호 무역증진과 산업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외교, 국방 등 정치적 문제의 상호의견 조율을 위해 유럽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미국은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유럽의 이 같은 공동체 건설 노력을 적극 지원했다.

 

마셜 플랜은 유럽 재건이라는 명분을 달고 있지만 이면에는 서유럽을 확실한 영향력 아래 두려는 미국의 의도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마셜 플랜의 의도는 아주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 마셜 플랜은 경제 회복을 통해 유럽이 통합을 일구어냈고 통합된 유럽은 다시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 곧, NATO의 결성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대항블럭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유럽경제협력위원회(CEEC)는 이후 상설기구인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Organization for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로 대체됐고 이는 1961 9월 다시 미국과 캐나다를 가입시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로 발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