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9일

손기정, 베를린올림픽서 마라톤 우승

산풀내음 2017. 7. 2. 16:08

1936 8 9,

손기정, 베를린올림픽서 마라톤 우승

 

11회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가 1936 8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 남아의 기상을 세계에 알렸다. 손 선수의 이날 기록은 2시간 2919초로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평안북도 의주부에서 태어난 손기정(孫基禎)은 어린 시절부터 장사에 나섰다. 14세의 나이로 철 따라 물건을 바꿔가며 참외와 각설탕, 군밤 장사 등을 했다. 덕분에 보통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으나, 6학년 졸업을 할 때까지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장사를 했다. 손기정은 집에서 학교까지 약 2킬로미터의 자갈길을 항상 뛰어다녔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마라톤 대회 13개에 참가하여 그 중 10회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1935년 올림픽 예선전에서 2시간 26 44초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고, 1935 11 3일에는 2시간 26 42초의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1947년까지 유지되었다.

 

1936 6 4일 경성을 출발한 열차는 손기정 선수의 고향인 신의주와 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거쳐 17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꼬박 13일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역에 도착한 손기정 선수는 환대를 받지 못했다. 마중 나온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왜 마라톤에 조선인이 두 사람씩이나 끼었느냐”고 불만을 털어놨다고 한다. 손기정 선수는 “보름 가까이 열차에 시달리며 도착한 곳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첫인사를 받게 되다니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고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사발라(Zabala)와 손기정의 다툼이었다. 처절한 사투는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이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결판이 났다. 이로 인하여 손기정은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이 때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사람은 다름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손기정은 히틀러와 악수를 했다. 손기정과 함께 출전하였던 남승룡은 동메달을 차지하였다.

 



자랑스런 올림필 금메달에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에 남승룡 선수. 일장기를 달았지만 자랑스런 대한의 아들들이다.

손기정 선수는 우승 후 일본 언론에 "이렇다 할 느낌은 따로 없다. 감격했을 뿐이다"라는 짧은 소감을 전했다. 그러나 "손기정 선수 우승 축하합니다. 우승소감을 들려 주십시오라는 조선일보 기자 전화에 그는 통곡했다.

 

그러나 손 선수의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달려 있었고 이름까지도 일본식인 `기테이 손(基禎 孫)`이어서 피지배민족의 서러움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한국어 이름으로만 서명했으며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신의 모국이 한국이라고 밝혔다. 시상식 때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 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당시 `민족의 영웅` 탄생에 기뻐하던 동아일보는 1936 8 25일자에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해 27 4차 무기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마라톤 우승 후 독일 베를린의 한 두부 공장에서 동양 남자 10여명이 사발과 놋쇠 그릇에 김치와 두부를 놓고 '축승회(祝勝會)'를 열었다. 축승회였지만 분위기는 엄숙했다. 벽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 일행이었다. 이들은 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일본 선수단이 여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조선인들끼리 몰래 축승회를 가졌다. 축승회를 준비한 사람은 베를린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하던 안봉근 선생이었다. 그는 안중근 선생의 사촌동생으로 베를린에 유학 와 독일 사람과 결혼했다.

 

손기정 선수는 그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봤는데 당시 감동을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온몸에 뜨거운 전류가 흐르는 듯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잃었던 조국, 죽었던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탄압과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살아 있듯 조선 민족도 살아 있다는 확신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손기정 선수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달려온 유학생 정석해씨는 손기정 선수의 손을 잡으며 “나는 손군이 단순한 운동선수라고만 생각지는 않네. 오늘 일본인들의 축하 파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나눈 동포들의 모임에 나와 주었으니 이야말로 애국지사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베를린의 영웅이 개선했지만 총독부의 통제로 여의도 공항은 환영인파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양정교장 안종원, 친형 손기만만이 손기정(왼쪽부터)을 마중 나왔다.

우승 후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지만 마치 중죄인을 다루듯 연행하고 있는 일본 순사들

경성의 명월관에서 열린 우승 축하연에 참석한 최승희와 함께

 

그리고 당시 마라톤 우승자에게 씌워 주려고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 신문사가 투구를 제작하였지만 손기정에게 전달되지는 않았다. 이 투구는 이후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1986년 손기정에게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1994년 국가에 투구를 기증했으며 정부는 손기정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서양 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 904호로 지정했다. 우리는 이를 ‘손기정 투구’라고 한다.

 

1946, 손기정은 '마라톤 보급회'를 창설했다. 광복 후 여러모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손기정은 마라톤 보급회를 창설하여 제대로 된 마라톤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1947년과 1950년에 코치직으로 활동하여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마라토너 서윤복과 함기용의 코치로 활동해 이들을 훈련시켰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고,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뛰기도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혔다. 1983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손기정은 2002 11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인해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복 직후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에서 태극기를 든 손기정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기수 손기정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기수 손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