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9일

YH여공 신민당사서 농성

산풀내음 2017. 7. 2. 16:13

1979 8 9,

YH여공 신민당사서 농성

 

1979 8 9일 서울의 YH무역 여성근로자 170여 명이 회사운영 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1970년대 초 수출순위 15위로 국내 최대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은 1970년대 중반부터 수출둔화와 업주의 자금유용, 무리한 기업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든데다 1975년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1979 3 30일 폐업을 공고했다. 이후 4달 동안 노동청을 비롯해 관계 기관을 찾아 다니며 필사적으로 대책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재야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8 9일 아침 몇몇 재야인사들이 상도동 김영삼 총재의 집을 찾았고 YH무역 노동자들의 도움 요청 건에 대하여 보고하였고 김영삼 총재는 기꺼이 허락한다. 여공들은 8 9일 오전 9시 반, 당사 문이 열리자마자 일제히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미 총재의 전화를 받은 직원이 여공들을 4층 강당으로 안내했다. 모두 187명이었다.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여공

 

오전 10시쯤 당사로 나온 김 총재가 총재단 회의에서 농성을 받아들이게 된 경위를 간단하게 언급한 뒤 4층으로 올라갔다. 충혈된 눈으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20대 앳된 여공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감정이 북받쳐왔다. 김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산업발전의 역군이며 애국자인데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합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강당 안에 커다란 박수 소리가 퍼졌다. TV에서나 보던 야당 총재가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주다니, 때마침 배달된 석간신문에는 농성장 사진과 기사가 크게 실렸다. 라디오 뉴스로도 크게 다뤄지고 있었다. 여공들은 ‘배고파 못 살겠다’라고 적힌 머리띠를 동여매고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장을 찾은 김영삼 총재

 

그러나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이를 재가했다. 경찰이 곧 강제진압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신민당사에 퍼진 것은 밤 10 40분경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긴급 총회를 열고 “경찰이 들어오면 모두 투신자살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일부 흥분한 노동자들은 창틀에 매달려 “뛰어내리겠다”고 울부짖었다.

 

마침내 정부당국은 치안상의 이유를 들어 8 11일 새벽 2시 경찰 1000여 명을 신민당사에 투입, 농성 중이던 근로자를 단 23분만에 강제 해산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근로자 1명이 추락, 사망하였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신민당원 및 취재기자들도 폭행당했다.

 




YH사태로 사망한 고 김경숙씨 장례식

1979 8 11, 퇴직금을 강제 수령 당하고 있는 여공들

 

1978년부터 김대중을 가택 연금했던 박정희 정권은 법원이 1979 9 8일 김영삼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리게 했다. 나아가 공화당과 유신 정우회가 지배하고 있던 국회는 10 4일에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했다. 김영삼이 의원직에서 제명된 지 9일 후인 10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어 10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0 16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해 대규모 독재타도,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쳤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대됐다.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부마항쟁에 대한 강경진압 여부를 두고 김재규 중정 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알력은 극심해졌고 이는 10.26과 유신정권의 종지부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