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산풀내음 2017. 7. 2. 07:19

1973 8 8,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김대중은 1971 4 27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경합한 신민당 후보로 나가 박정희에게 석패하였다. 대선이 끝나고 총선 유세가 한창이던 1971 5월 영등포 지역 지원유세를 위해 서울로 가던 도중 전남 무안군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그 후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당시의 이 교통사고에 대해 김대중은 내내 박정희 정권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다만 당시의 교통사고 가해 트럭 운전자는 이후에도 내내 오히려 김대중 차량이 교통법규를 어겨 발생한 사고라고 주장하였고, 당시 담당 검사이자 1980년 김대중 변호인단 중에 한 명이며 야당 국회의원까지 한 허경만도 당시에 특별한 외압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와 김대중

 

1972 10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며칠 뒤인 17비상계엄령과 동시에 10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으로 망명을 택한다. 1973 7 6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조직했고, 710일 일본으로 돌아와 한민통 일본 지부 결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이후락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보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의 바로 그 이철희)에게 김대중에 대한 특단의 조치를 지시하고 이철희는 해외공작국장 하태준과 일본 현지의 중정 책임자인 주일공사 김재권 등을 불러 공작 계획을 수립했다.

 

1973 8월 8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당수인 양일동과 국회의원 김경인과 함께 담화를 나누고 자유민주당 기무라(木村) 의원과의 약속장소로 출타하던 김대중이 한국인으로 보이는 괴한들에게 납치당했다. 그 괴한들은 바로 해외공작단장 윤진원, 주일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일등서기관 홍성채, 김동운, 이등서기관 유영복, 유충국 등이고 일등서기관 한춘은 현지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정보요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어설퍼 납치 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육안으로 봐도 뚜렷이 보이는 지문을 남겨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괴한들은 오사카 또는 고베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 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보트에 태워 30~40분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김대중을 인계한다.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을 배 밑 쪽 선실로 끌고가 손발을 묶고 눈을 가린 다음 다리에 돌을 매달았다. 용금호가 항해하는 중, 일본 국적기로 추정되는 비행기가 나타났고 이런 과정 끝에 김대중은 부산항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해 구급차에 태워지고 수면제에 의해 잠이 들었다. 잠이 깼을 때는 2층 양옥에 있었다. 다시 어두워지자 차에 태워진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 13일 저녁 10 30분경이었다.

 

1973 88일 중정 요원들이 김대중을 납치했던 일본 도쿄의 그랜드팔레스호텔(왼쪽). 납치 뒤 가까스로 풀려난 뒤 자택으로 돌아와 울먹이며 기자회견을 하는 김대중.


납치한 김대중을 오사카항에서 부산항으로 실어 보낸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

 

주한 미국 대사관은 8 8일 오후 3시경에 '납치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 CIA가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대사에게 알렸다. 하비브는 즉각 청와대에 납치 사실을 미국이 알고 있고 한국 정부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통보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 제롬 코언(Jerome A. Cohen)도 마침 일본에 머물던 재미교포 임창영의 연락을 받고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에게 전화를 했다. 키신저는 모든 조직을 동원하여 진상을 파악하고 김대중을 구할 것을 지시했다.

 

유신체제 10개월 만에 일어난 이 납치사건은 체제에 반대하는 정치적 라이벌을 권력의 힘으로 제거하려는 했다는 사실이 국내외에 큰 물의를 빚었다. 특히 이 사건은 한일관계에 큰 마찰을 일으켰다. 사건 86일만인 1973 11월 1, 한국 정부는 납치 사건에 대한 주일 한국 대사관 직원의 관여 혐의를 인정하고 사의를 표명하려는 의향을 표명했으며,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면직시켰다(다만 이것은 김동운 일등서기관이 범인이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납치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다음날에는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828일 북한은 김일성의 동생인 남북조절위원회 평양측 공동위원장 김영주의 명의로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범인 서울측 공동위원장 이후락과는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다며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102일에는 유신 선포 1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2월에는 김수환 추기경,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 등의 주도로 개헌청원 100만 서명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로 대응하였고 결국에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유신반대 학생운동. 1973 10 12일 조선일보 게재 사진

 

그러나 김대중 납치 사건에는 두 가지 쟁점이 아직 남아 있다. 하나는 김대중의 납치가 박정희의 지시를 이후락이 실행한 것인지, 아니면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이 박정희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단독으로 저지른 것 인지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건의 원래 계획이 김대중 살해인지 단순 납치인지 여부이다. 결론적으로 여러 가지 정황상 박정희가 최소한 묵시적 동의는 한 것으로 판단되며, 납치 자체보다 김대중의 완전한 제거, 살해의 의도도 다분히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다수의 의견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