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8일

버마 8888항쟁 (8888 Uprising)

산풀내음 2017. 7. 2.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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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8888항쟁 (8888 Uprising)

 

19세기 3차례에 걸쳐서 영국과 전쟁을 벌인 버마는 결국 188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은 버마를 인도의 한 주로 편입시켰고, 인도에서 파견된 관리와 더불어 당시 소수족인 카렌족을 기독교 선교사들이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시킨 후 다수의 버마족을 지배하도록 하는 교활한 방법으로 70여 년을 식민 통치했다. 그러나 아웅산 장군(Bogyoke Aung San, 1915 - 1947)이 이끄는 따킨당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이 이들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자 아웅산 장군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장개석 군에게 지원되고 있는 영국과 미국의 군수물자들이 버마 루트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기에 아웅산의 도움 요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요청이었다.

 

1941년 태국의 방콕에서 버마독립의용군이 결성되었고 일본 군대를 등에 업고 진군하여 3개월 만에 영국군을 몰아내고 1943 8 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당초의 약속을 저버리고 친일인사로 하여금 군정을 실시하고 영국보다 더 악랄하게 식민통치를 자행하였다. 아웅산 장군은 다시 연합군인 영국에 도움을 청하였고 영국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아웅산 등 독립의용군의 안내를 받아 1945 3월 또 다시 버마로 진군하여 일본을 패퇴시켰다.

 

그리고 아웅산 장군은 영국과 독립교섭에 들어갔고 마침내 1948 1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웅산 장군은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하고 독립 5개월 전인 1947 7 19일 암살 당하고 말았다.

 

Bogyoke Aung San(M)

 

어렵게 이룬 독립이지만 민주주의 정착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비옥한 토지에 동남아시아 최고의 지하자원 보유 등으로 1962년 군사쿠데타 이전까지만 해도 신생국 싱가포르의 이광요 총리가 정권을 잡았을 때 국민들에게 "버마만큼 잘 살게 해 주겠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동남아시아의 맹주였고 우리나라도 버마로부터 쌀을 원조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1961년에는 버마 출신 우 탄트(U Thant, 1909 - 1974)가 유엔 사무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개발도상국 및 아시아 출신으로는 최초였다. 그는 1971년까지 사무총장을 지냈다.

 

U Thant, UN Secretary General

 

그러나 1962년 아웅산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동료이자 당시 국군의 최고 지휘관(국방장관)이었던 네윈(Ne Win, 1911 ~ 2002)은 정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버마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정책(버마식 사회주의)을 채택했고 혁명 평의회 의장을 거쳐 1974년부터 1981년까지 대통령이 되었다. 우산유(U San Yu)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준 후에도 버마 사회주의 계획당 (BSPP, Burmese Socialist Program Party) 의장을 임하며 국정에 군림했다. 이 기간에 버마는 외교에서는 엄정한 중립 정책을 취해 주변 제국의 혼란에 말려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경제 정책에서는 완전히 실패해 세계의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988년 네윈이 물러나고 새롭게 실권을 잡은 르윈(U Sein Lwin, 1923-2004) 장군은 버마 혼란의 원인을 체제 문제가 아닌 지도자의 문제라며 군 출신 및 강경파 인물들을 각료로 임명하고 아웅 지 장군과 언론인 세인 윈 등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반정부인사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버마는 봄부터 시끄러웠다,

 

1988 3월 찻집에서 일어난 다툼이 다른 분쟁을 촉발하고 그 가운데 한 학생이 공안요원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되었다. 학생들에 의해 민주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요청에 관계 당국이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6, 군부에 저항하는 시위가 다시 벌어졌다. 그 해 7, 사회 불안정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BSPP 의장 네 윈(U Ne Win)과 대통령 우 산유(U San Yu) 그리고 몇몇 고위 관료들이 사임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직은 당시 장군이었던 르윈에게 7 27일 승계되었고, 이어서 르윈는 8 3일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6년 군부독재에 대한 한이 마침내 폭발하는 날이 왔다. 1988 8 8일이었다. 버마 국민들은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학생들과 승려들이 앞장섰고 3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수도 랑군에 모여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시위 초기 군부는 관망하는 듯 했으나, 강경진압이 시작되어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지만, 시위대는 돌을 던지거나 자전거 살을 화살 삼아 쏘면서 맞섰고 상당수의 공무원, 군인, 심지어 정보기관원들까지도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에 의해 랑군 북부 페구시가 장악되는 등 사태 진정 기미는 보이지 않게 되자 결국 유혈시위 5일 만인 812일 집권 17일만에 르윈 대통령은 대통령과 BSPP의장직을 포함한 모든 주요 공직에서 사임했다. 사임보도 후 랑군 시내에는 많은 시민들이 통금령을 무시하고 거리에 나와 승리를 축하했으며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워 춤추며 환호성을 올렸다.

 

르윈을 사임시킨 사회주의계획당은 르윈 사임 일주일 후인 19일 온건파 마웅마웅(U Maung Maung)을 당의장 및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나, 집권세력에 대한 반발 및 총선거 실시, 다당제 도입 등을 주장하며 시위는 계속되었다. 24일 마웅마웅 대통령이 다당제 채택에 관한 국민투표를 제의하고, 정부는 9 3일 선포된 계엄령을 해지하며 사태는 새 국면을 맞았다. 이날 랑군 시위에 버마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치 여사가 참여하며 눈길을 끌었다.

 

BSPP에 대한 반대로 정국이 혼미한 가운데, 집권당에 대항하는 학생·청년층이 중심이 된 민주화연맹과 우누 전() 총리와 만 윈 마웅 전() 대통령이 중심이 된 민주평화연맹, 아웅산 수치 여사 지지세력, 아웅 지 장군 지지세력 간의 이견으로 사회불안이 가중되었다. 반정부지도자들이 9 9일 집권 사회주의계획당의 마웅마웅 대통령을 대체할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자, 10일 사회주의계획당은 다당제에 의한 총선을 제안했으나 야권은 이를 반대하며 집권당의 즉각 퇴진과 과도정부수립 및 자유총선 실시를 촉구했다.

 

정부와 반정부지도자들 사이에 과도정부 수립에 관한 협상이 계속되던 중 9 18일 국방장관 사우마웅(Saw Maung, 1928-1997) 장군이 이끄는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 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 가 쿠데타를 단행하여 국가 통치권을 장악하며, 버마사태는 일단락되었다.

 

A soldier orders the pro-democracy protesters to disperse in downtown Rangoon in 1988. 


 

1990 3 27일 총선이 이루어지고 아웅산 수지(Daw Aung San Suu Kyi)가 이끄는 정당 버마민족민주동맹(이하 NLD) 82%가 넘는 국회 의석을 확보하며 대승리를 거두었다. 국제 사회와 유엔 심지어 SLORC도 인정하는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약속과 달리 BSPP에서 계승된 국민통일당(National Unity Party)은 권력 이양 약속을 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