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6일

이탈리아 교육자 몬테소리 사망

산풀내음 2017. 3. 18. 20:09

1952 5 6,

이탈리아 교육자 몬테소리 사망

 


1952 5 6일 이탈리아의 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1870 8월 31 ~ 1952 5월 6) 82세로 작고했다.

 

이탈리아의 안코나 지방에서 태어났다. 귀족 출신의 아버지 알레산드로(Alessandro Montessori)와 교육자 가정출신의 어머니 레닐데 스토파니(Renilde Stoppani)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몬테소리가 세 살 때 그녀의 부모님은 딸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로마로 이사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았고, 수학신동으로 불렸다.

 

그녀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 1890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로마대학의 의과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로마대학 의과대학에 입학을 거절당하게 된다. 그러나 몬테소리는 이탈리아 왕과 교황을 만나 설득해, 결국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1896 26세의 나이로 몬테소리는 로마대학의 의학부를 졸업해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로마대학의 부속병원에서 정신과의사의 조수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녀가 하는 일은 로마에 있는 종합 정신병원에 수용된 어린이들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이곳에 있던 어린이들은 마땅히 손을 놀릴 수 있는 대상이 없어서 식기와 빵 조각만이 유일하게 그들의 놀이대상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먹을 것만 찾는 동물과 같다고 여기며 멸시했다. 그곳을 방문한 후에 몬테소리는 지능발달이 늦은 아이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아이들에게 특수교육이 적합하다고 보고 이 분야의 초기 개척자인 프랑스 정신과의사 이타르(Jean Itard)와 세강(Edouard Seguin)의 업적을 연구하기 위해 런던과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몬테소리는 로마에 귀국해서 State Orthophrenic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몬테소리는 이 학교에서 2년간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이타르와 세강의 연구로부터 얻은 착상을 자신의 교육방법의 근거로 삼았다. 그녀는 아침 8-저녁 7시까지 종일 교육을 하였고, 밤늦게까지 새로운 교구준비, 노트작성 및 관찰, 하루 일에 대한 성찰을 하는 등 쉼 없이 교육준비를 했다. 훗날 몬테소리는 여기에서 보낸 2년이야말로 ‘진정한 교육학 학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1907년에 이탈리아 산 로렌소의 빈민가의 탁아소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고 이를 수락하게 된다. 이곳에서 몬테소리는 몬테소리법에 의한 교육을 실시했다. 몬테소리는 어린이의 권리를 존중하고 어린이가 스스로 자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 상태에서의 자유로운 교육을 강조했고, 특히 어린이의 독립심과 지적 발달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환경이 필요하다고 보고 감각교육에 치중한 구체적인 교구를 연구하고 개발했다. 아이들의 촉각, 시각, 청각을 자극하는 감각교구들과 일상생활을 연습하게 하는 생활교구들이 장난감 대신 사용됐다. 이 기회를 몬테소리는 정상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보았다.

 

이 어린이 집에서 그녀는 유아교육을 실천한 후에, 의학계를 떠나 오로지 어린이와 함께 할 것을 굳게 결심하게 된다. 같은 해 산 로렌소의 두 번째 학교가 문을 열었다. 1908년에는 밀란에 세 번째 학교가, 로마에는 네 번째 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 학교들은 처음 어린이 집과는 달리 유복한 부모를 둔 아이들을 위한 학교였다. 몬테소리가 세운 이 학교와 그녀의 교육방법은 금새 유명해졌고, 1909년까지 스위스에 있던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아원이나 어린이 집에서 몬테소리의 교육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국 잡지사의 편집국장 맥쿨루(Mr. McClue)가 몬테소리의 교육방법을 호평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1911년 이탈리아영국에 몬테소리 학회가 설립되었고, 이탈리아-영국의 초등학교에는 정식으로 몬테소리 교육프로그램이 도입되었다. 1912년에 몬테소리는 강의를 위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Alexander Graham Bell을 회장으로 미국에는 몬테소리 협회가 설립되었다.

 

1933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몬테소리 교육은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히틀러는 “몬테소리 교육이 독립적인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이유로 독일이 점령한 모든 나라에 몬테소리 학교를 폐쇄하였고, 무솔리니도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몬테소리 학교를 폐쇄하였다.

 

1936년에 바로셀로나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몬테소리는 네델란드에 영구적으로 거주하게 된다. 1939년 몬테소리는 간디, 네루, 드골 등의 지원을 받아 인도에서 6개월간의 훈련과정을 전수시키러 갔으나 제재를 받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녀는 인도에서 이탈리아 국적자로 억류 당했지만, 은둔생활을 하며 인도에 많은 학교를 건립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몬테소리는 네덜란드로 귀국한다. 이리하여 네덜란드에는 몬테소리 지부가 설립되고, 산레모에서는 제8회 국제 몬테소리 회의를 개최되었다. 이로 인해 몬테소리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노벨평화상을 정중이 사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