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4일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사망

산풀내음 2016. 11. 5. 15:07

1799 12 14,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사망

 

1799 12 14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2. 22. ~ 1799. 12. 14.)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자립하기 위한 독립 전쟁을 이끈 총사령관이었고, 독립한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발전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를 흔히 미국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 혹은국부라고 부른다.

 

 

미국 사우스다코다 주 러시모어 산 허리에는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즉 미국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한 네 명의 대통령 두상이 조각되어 있다. 독립과 건국에 기여한 조지 워싱턴, 영토 확장에 기여한 토마스 제퍼슨, 남북 분열을 방지하고 노예 해방을 선언한 에이브라함 링컨, 그리고 20세기 미국의 산업발전에 앞장선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그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현대적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고 토대를 닦은 워싱턴은 최고의 대통령으로 손꼽힌다.

 


 

1732년 버지니아주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토지측량관이 됐다. 1774년 제1회 대륙회의에, 1775년 제2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의 대표로 참석하고, 이 회의에서 무력항쟁이 결의되자 그는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피로에 지친 식민지군을 격려, 역경을 극복해나갔다. 1781년 10월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대통령(President)이라는 직함을 가졌던 최초의 인물은 당연히 대통령제를 최초로 도입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다. 1789년 2월 4일 치러진 선거인단 투표에서 그가 선출됐다. 당시 미국 13개 주 가운데 연방제에 반대해 선거인단을 안 낸 뉴욕 주를 제외한 12개 주 69명의 선거인단은 각자에게 주어진 2표 중 1표로 모두 워싱턴을 지명했다. 그는 전무후무 유일무이 득표율 100% 당선자였다. 같은 해 4월 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워싱턴은 독립선언문(사실상 최초의 성문헌법)과 권리장전(수정헌법)이 천명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지고, 기세 등등한 각 주 정부를 품는 한편 연방정부의 위엄과 권위도 과시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문제는 그도, 누구도 대통령이 어떤 존재인지, 국왕과는 뭐가 같고 또 다른지 알지 못했다. 취임 초기 워싱턴이 자신을 유럽의 왕들처럼 3인칭으로 호칭하면서 권위적으로 관료와 국민을 대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런 처신이 대통령과 연방 정부의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43살(1775년)에 이미 대륙군 총사령관이 돼 독립전쟁을 이끌었고, 1787년에는 필라델피아 헌법제정의회 의장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공직을 맡지 않고 버지니아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에게는 아내(마사 워싱턴)가 전 남편(사별)에게서 물려받은 땅 등 80여㎢(약2,500만 평)가 넘는 토지와 3,000여 명의 노예가 있었다. 그는 사실상 영주였다. 물론 식민지 시절과 독립전쟁을 거쳐 온 미국 시민들과 건국의 ‘아버지’들로선 영국 왕정과 강한 통치자에 대한 저항감이 깊었고,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등 반연방파도 정부 내에 있었다. 연방 헌법과 권리장전이 못 받은 민주주의 원칙 역시 저 이념적ㆍ경험적 바탕에 근거한 거였다.

 

대통령 기간 중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선언하고, 유럽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수립했다. 워싱턴 연임했고, 1797년 임기를 마친 뒤, 종신 대통령으로 임해달라는 각료들의 요청을 뿌리치고 퇴임했다. 그럼으로써 취약한 민주주의와 대통령중심제 정치 현실에서 장기 집권의 욕심이 초래할 수 있는 파국적 부작용을 스스로 차단했다. 그 선례는, 2차 대전 중 루스벨트의 3선을 제외하곤 불문율처럼 지켜졌고, 1951년 수정헌법 22조(대통령 당선 2기로 제한ㆍ1951년)로 명문화됐다. 그의 공로는 취임 전과 재임 기간의 업적 못지 않게 스스로 물러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통해 대통령과 미국 정치윤리에 대한 시민들의 눈을 한껏 높여놓고, 2년 뒤인 1799년 별세했다.

 

1796년 9월, 필라델피아의 <American Daily Advertiser>에 기고된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Farewell Address)는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 게티스버그(Gettysburg Address) 연설과 더불어 중요한 미국 역사 사료로 꼽힌다. 이 고별사에서 워싱턴은 세 번째의 출마를 사양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미국민들에게 대내적으로는 정당 간 및 지역간의 대립을 경계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분쟁에의 개입을 경고하며, 경제적 확립을 위하여 국가의 재정적 신용을 높일 것을 당부했다.

 

George Washington’s Farewell Address :

http://www.americanhistory.or.kr/book/link/d-179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