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4일

재일동포 제1차 북송

산풀내음 2016. 11. 5. 15:20

1959 12 14,

재일동포 제1차 북송

 

1959 12 14, 재일동포 234세대 975명을 실은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일본의 니가타(新潟)항을 출항, 북한 청진항으로 향했다. 배에 탄 사람들의 얼굴에는 일본인들의 차별로부터 벗어난다는 기쁨과 ‘지상낙원’으로 떠난다는 설렘이 교차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1,800여 명의 경찰을 부두에 배치하고, 10여척의 함정을 동원해 근해를 감시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재일동포를 추방하려는 일본의 은밀한 계획과,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대남공작원으로도 활용하기 위한 김일성의 계략이 맞아떨어져 성사됐지만 한국 측의 집요한 설득과 압력으로 처리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59 12 10, 북한으로 가기 위해 일본 교토역에서 니가타로 향하는 귀환 전용 열차에 탑승하는 재일(在日) 조선인 가족들이 배웅 나온 아이의 꽃다발을 받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나흘 뒤인 14일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떠났다. /마이니치신문

1959. 12. 14. 재일동포를 태운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을 떠나고 있다.

1960 1월 북송선

 

재일조선인(在日, 자이니치)은 일제강점기 시절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거나 2차 세계대전 때 강제로 동원된 노무자들이 대부분으로, 뼛속부터 우리 민족이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이들은 마음 놓고 귀국할 여지가 없었다. 가족과 재산이 무사히 조선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을뿐더러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대부분 귀국을 포기하게 된다. 오히려 전란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 오는 조선인들이 증가하면서 재일동포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어버렸다.

 

일본에 있던 우리 동포들은 일본 사회의 소수자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사회에서 '자이니치'라는 수식어는 재일동포의 많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박탈했고(실업률이 일본인의 8), 이들은 엄청난 차별 대우를 감내해 가며 그렇게 서러운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향살이와 마이너리티의 설움으로 지친 재일동포들. 그래서 더욱 "남한은 거지투성이지만 의식주가 무상으로 제공되는 지상낙원인 북한"으로 돌아가자는 캐치프레이즈에 강하게 마음이 끌렸을지도 모른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다. 이날 재일동포들은 인생의 모든 희망과 기대, 설렘을 안고 2척의 여객선에 올랐다.

 

일본과 북한적십자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동포 북송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 것은 1959 8 13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곧, ‘한일기본협정' '평화선 철폐'등을 체결하겠다며 북송중단을 설득했고, 국민들도 연일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날부터 시작해 1984년까지 25년간 186차례에 걸쳐 9 3,340명의 재일동포(일본인 6,703명과 중국인 7명 포함)들이 북으로 보내졌는데 이들은 애초 기대와는 달리 북한에서 동요계층 또는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결혼, 전직, 거주지 등 생활전반에 걸쳐 엄격한 감시하에 놓이게 됐다. 일본인 처들은 그 후로 일본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일본 오사카(大阪) 태생 탈북자 고정미 씨는 "청진항에 도착한 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며 울며 보채던 친오빠는 인민군에게 끌려갔고 곧 '정신병환자'로 격리 수용되었다", "유골도 없이 사망통지서만 날아온 것은 8년 후였다"고 회고록에 밝힌 바 있다.

 

제일동포 북송사업 반대 시위

 

북송사업은 북한과 조총련의 주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언론 또한 북송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과 언론은 좌우를 막론하고 조총련처럼 북한에 대해 칭찬 일색이었다. 북한을 '지상낙원'이라 선전하며 재일조선인의 귀국 사업을 아주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일례로 <아사히신문>"귀국 희망자들 증가한 것은 북한이 '완전취업', '생활보장'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긍정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귀국자들의 편지처럼 근거없는 내용을 보도한 바 있었다. <산케이신문>"따뜻한 숙소와 환영", <요미우리신문>"북으로 건너간 일본인 부인들 '꿈같은 설날' … 오길 잘했다"와 같이 조총련의 입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보도했다.

 

()1960 2 26일자, ()1975 4 19일자 귀국사업을 지지하는 내용의 '아사히신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