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11일

장학량, 가택연금에서 풀려…

산풀내음 2017. 3. 24. 20:27

1977 5 11,

장학량, 가택연금에서 풀려

 

장학량(張學良, Zhang Xueliang, 영문이름 Peter Hsueh Liang Chang, 1901-2001)은 청 말기 동북 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의 동북변방군사령관과 서북비적토벌사령관 등을 지낸 비공산계 인물이다. 1930년대 중반 공산당과의 내전보다는 항일투쟁을 원하는 동북군의 열망을 업고 1936 12월 서안을 찾은 장개석을 연금, 이듬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부터 궤멸돼가던 중국 공산당은 재기의 기회를 얻어 국공내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뒀지만 정작 본인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다.

 

 

 

항일운동 당시 장학량과 장개석

 

장개석과 함께 남경으로 온 장학량은 체포되고 감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나이 39살 이었다. 1949년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쫓겨 갈 때에도 장학량을 데려 갔는데, 이후 그는 타이완에서 감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대만에 대해 장학량의 가택연금 해지와 중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했었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장학량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주의자이고 자신들의 구세주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1953년 연금 당시

 

 

장개석의 원성을 피할 수 없었던 장학량은 그가 죽고 난 2년 후인 일흔이 넘은 1977년에야 연금생활 54년 만에 비로소 가택연금에서 풀려 났고, 이후 1993년에 정부로부터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 받자, 하와이로 가서 살다가 2001 101세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다.

 

 

장학량의 여인, 조일적(자오이디)

 

장쉐량(장학량)과 자오이디의 숭고한 사랑이야기_술, 담배, 마약, 색까지 즐기고도 104살까지 산 그의 비결은?
https://www.youtube.com/watch?v=sqtws5sYEsk

 

 

‘주은래’는 술을 즐기고 담배는 멀리 했는데 79세까지 살았고, ‘모택동’은 술을 멀리하고 담배만 즐겼는데 84세까지 살았다. ‘등소평’은 술과 담배를 모두 즐겼는데도 94세까지 살았다. 그런데 장학량은 술, 담배에 여색도 가까이 했지만 104세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말년에 스스로 “평생 동안 아쉬운 일은 없으며 단지 여인을 좋아한 것일 뿐”이라고 토로했다고 하는데, 역사학자인 당덕강(唐德剛) 교수에게 “나의 여인 편력사를 책으로 내면 큰돈을 벌 것이다”고 언급할 정도로 관계가 알려진 여성만 해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렇지만 장학량은 두 번째 부인과 열렬한 사랑을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세기의 사랑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장학량의 두 번째 부인은 조일적(趙一荻, 자오이디, Edith Chao, 1912-2000)인데, 그녀와 장학량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듯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다. 그녀의 깊은 애정은 54년 동안 연금생활을 했던 장학량으로 하여금 고독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건강장수에 매우 유익하게 작용했다.

 

중국의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주간신문 '환구시보(環球時報)'가 그녀의 일생을 소개했는데, ‘중국현대사에서 상당히 신비로운 여성인 조일적은 장학량과의 전설적 사랑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됐다’고 적었다. 조일적은 절강성(浙江省)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이 중앙정부의 교통차관을 지냈다. 6 4녀의 막내딸로서 선천적으로 미모와 총명을 겸비한 재원이었는데, 열너댓살 때 이미 ‘북양화보(北洋畵報)’란 잡지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천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1926년 채공관이라는 사교장에서 열린 그녀의 생일무도회에서 당시 ‘4대 공자(公子)’의 한 사람이자 청년원수로 불리던 장학량과 처음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다음 해 여름에 그녀는 가족과 함께 북대하로 피서를 갔는데 마침 그 곳에 휴양차 와 있던 장학량과 재회하고 친해졌던 것이다. 천진으로 돌아와 자주 만나 춤을 추면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당시 장학량은 이미 유부남이었다.

 

 

 

 

조일적의 아버지는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딸이 장학량과 같이 있는 것을 알고 분기탱천해 집안에 가두어 놓았다. 하지만 조일적은 1929년 여섯째 오빠의 도움으로 가출하여 심양으로 가서 장학량과 동거하게 된다. 당연히 집안에 난리가 났는데, 아버지는 신문에 ‘부녀관계를 끊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광고까지 냈다고 한다.

 

장학량의 본부인 우봉지(于鳳至)는 조일적에게 비서자리만 주고 정식 부인의 지위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꺼이 비서신분으로 장학량을 모셨다. 본부인은 조일적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진심으로 장학량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집을 하나 지어주고 살게 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형님아우하며 화목하게 지냈고, 조일적은 다음 해 아들을 낳았다.

 

1933년경 장학량은 전투에 패한 뒤에 보직에서 해임되어 실의에 빠졌고 아편에 중독되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 때 홍콩에 있던 조일적은 장학량을 찾아가 고통을 지켜보면서 아편을 끊게 만들어 건강을 되찾고 재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시안사변 후에 연금을 당해 어려웠던 시절에도 조일적은 장학량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1964년에 본부인 우봉지가 장학량과 이혼해 주었기 때문에 64세와 51세의 나이로 대만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고도 계속 반연금 상태에 있다가 1993년에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어 하와이로 이주해서 살았는데, 7년 뒤인 2000년에 조일적은 88세의 나이로 장학량과 손을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 장학량은 휠체어 신세를 지는 100세가 넘은 노인이지만 줄곧 부인의 침상을 지켰고, 부인이 숨을 거두고 나서도 근 한 시간 동안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다고 한다. 무려 71년에 걸친 부부의 사랑이 끝나자 장학량은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House arrest life of Zhang Xueliang with Zhao Yidi in Taiw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