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30일

프랑스 콩코드, 마지막 운항

산풀내음 2017. 4. 23. 08:14

20035 30,

프랑스 콩코드, 마지막 운항

 

"시장이 원했던 것은 비행 속도가 아니라 많은 승객과 저렴한 항공료 등 경제적 효율성이었다." 영국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스(FT)는 프랑스와 영국의 합작 개발품인 초고속 여객기 콩코드의 운항 중지가 발표된 2003 4 11(현지시간) '아듀 콩코드'라는 제목의 특집기사에서 콩코드 사업 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진단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개발로 탄생했던 콩코드는 1969 3 2일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의 시험비행 성공을 시작으로 1969 10 1일에는 초음속비행에 성공했다. 또한, 1970 11 4일에는 마하2(시속 2155km)를 기록하기도 했다. 1976 1 21일 비로소 상업운행을 개시함으로써 콩코드기는 민간 항공여행의 초음속 시대를 열었다.

 


 

25년간 가장 빠르고 안전한 여객기로 평가 받아온 콩코드기가 2000 7 25일 파리 북부지역에 추락, 113명의 목숨을 앗아가자 콩코드기의 안정성에 논란이 일었다. 그로부터 2년여 후 2003 5 30, 그 화려했던 기록들을 뒤로 하고 파리~뉴욕간 운행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는 동력에 의해 하늘을 나는 ‘비행기’라는 기계를 최초로 발명하고 1906년 특허를 획득했다. 그로부터 8년밖에 지나지 않은 1914, 러시아는 최초로 ‘여객기’를 개발해 16명의 승객을 태우고 상업적인 운항을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같은 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서비스를 중단해야 했지만 이후로도 여객기의 개발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1919년에는 독일이 최초로 금속을 이용해 동체를 제작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일이 가능해졌다.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을 이뤄낸 나라는 미국이었다. 1932년에 이미 두 겹의 날개로 된 기존의 쌍엽기를 탈피, 윤기가 흐르는 현대적인 단엽 여객기를 개발했고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인력과 장비를 수송하는 데 여객기를 투입해 전투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를 제작하고 세계 여객기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미국의 비행기 산업은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에 영국항공기법인(BAC)과 프랑스 쉬드아비아시옹(Sud-Aviation)사는 1962 11 29일 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초음속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비행기의 이름으로 ‘조화, 협력, 화합’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콩코르드(Concorde)’를 제안했고, 영국의 의견을 반영해 결국 끝의 e가 빠진 영어 단어 ‘콩코드(Concord)’로 확정됐다가 나중에 다시 e가 붙었다.

 

두 나라가 콩코드 개발에 정부 예산을 쏟아 붓기로 한 것은 60년대 미국 아폴로 계획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국가 위신을 세우기 위해 아폴로에 필적할 만한 자랑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두 나라 정부가 무려 190억 달러의 돈을 퍼부은 덕분에 콩코드는 유럽 항공산업의 첨단기술을 드러내는 '유럽의 자존심'으로 떠올랐지만 시장에서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음속의 두 배가 넘는 속도로 대서양을 3시간20분 만에 주파하면서 유럽과 미국을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었으나 1백 명에 불과한 탑승인원과 음속을 돌파하면서 나오는 소음이 문제였다. 운행 중단을 발표하던 날 파리발 뉴욕행 마지막 콩코드기의 승객은 12명에 불과했다. 135백 달러에 달하는 비싼 왕복 항공료도 실패의 요인이었다. 세계적인 불황으로 기업 고객들이 경비를 아끼는 바람에 승객수가 급속히 줄어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