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6월/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최루탄 맞고 혼수상태

산풀내음 2017. 5. 3. 07:04

1987 6 9,

연세대 이한열, 최루탄 맞고 혼수상태

 

1987 6 9일 연세대 경영학과 2년 이한열군이 교문 앞에서 시위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눈이 돌아간 채 피를 흘리고 있다. 쓰러진 그를 부축한 이종창(당시 연세대 도서관학 2학년)의 눈빛엔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서려 있다. 이 사진은 당시 로이터통신 기자였던 정태원이 1987 6 9일 오후 4 30분쯤에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은 다음날 당시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스 1면에 실리면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이한열을 세브란스병원으로 긴급히 옮기는 연세대 학생들


세브란스병원 앞에 이한열을 지키기 위해 모인 학생들

 

전두환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국민들은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게다가 2월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른바 4·13호헌조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1987 5 9일 연세대 교수 40명은 ‘헌법개정과 정부가 할 일에 대한 우리의 제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어 5 12일 대학원생 879명이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지지하며 즉각적인 호헌철폐를 주장했다. 한편 5 9일부터 호헌철폐를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던 학생대표들이 전경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연행되자 5 15 4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총학생회장 우상호가 ‘총학생회가 준비한 실천방안‘을 내놓고 ‘호헌철폐와 민주화 실천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학생들의 투쟁열기는 고조되었다. 1987 6 9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기로 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개최되었다. 전국에 갑호비상령이 떨어진 가운데 이한열도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교문을 사이에 두고 ‘백골단‘과 시위대가 공방을 나누는 가운데 충돌이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이한열은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에 뒷머리를 피격 당하여 쓰러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일 시청에 가야 하는데..”였다. 언젠가 그가 노트에 메모한 대로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제물이 되어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던 그는 사경을 헤매다 7 5일 새벽 2시 결국 사망하였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6 12일 ‘살인적 최루탄 난사에 대한 범연세인 규탄대회‘를 최루탄과 다발탄 페퍼포그가 난사됨에도 불구하고 비폭력 평화시위로 치뤘으며, 6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행진‘에 이어 7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전국민이 지켜보고 애도하는 가운데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및 치사 사건은 이렇듯 6월항쟁을 임계점으로 끈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2005 6 9일 신촌에 이한열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자꾸 눈물이 난다. 그리고 나 자신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