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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창설

산풀내음 2017. 5. 4. 17:07

1961 6 10,

중앙정보부 창설

 

5·16 쿠데타의 성공 여부가 아직 불투명하던 1961 5 18, 쿠데타 감행의 주역인 김종필 예비역 중령이 육사 8기 동기생들을 서울 정동의 하남호텔로 불러 모아 중앙정보부 설치를 논의했다. 김종필이 구상한 조직은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을 절충한 국가정보기관이었다. 이들은 5 21일 제2공화국 때 장면 총리의 직속으로 있던 중앙정보위원회의 이후락 실장으로부터 중앙정보위의 업무 일체를 인수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중앙정보위는 자유당 시절이던 1959 1월 이후락 소장이 김정렬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아 창설한 일종의 정보기관으로, 미국의 CIA가 넘겨주는 방대한 양의 정보문서 정리를 주요 임무로 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군의 방첩대, 정보국, 첩보부대, 헌병대, 경찰 등의 수사기관에서 불러들인 사람들로 채워졌다. 요직의 김종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김종필은 5 28일쯤 중앙정보부 창설안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게 가져가 장도영 의장의 결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장도영 의장이 결재를 보류하자 김종필은 장도영이 자기 사람을 심으려 한다고 의심했다.

 

법적 절차를 밟기도 전에 사실상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활동하던 김종필은 이미 활동을 시작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동원하여 6 1일 장도영의 측근이자 육사 5기인 김일환 대령 등 3명을 구속했다. 장도영도 6 6일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직을 내놓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내각 수반직만 수행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사실상 실권은 모두 빼앗기고 실권이 없는 자리만 차지하게 된 것이다.

 

장도영이 이처럼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한 가운데 국가재건최고회의는 6 10일 중앙정보부법을 법률 제619조로 공포해 중앙정보부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정식 발족시켰다. 중앙정보부법은 전문이 9조로 된 아주 짧은 법안이긴 했지만, 무소불위의 권한을 담고 있었다.

 

1971 6 10일 영빈관(현 신라호텔)에서 열린 중앙정보부 창설 10주년 기념연회에 참석한 역대 중앙정보부장들. 왼쪽부터 김종필(초대), 김용순(2), 김재춘(3), 김형욱(4) 전임 부장과 이후락(6) 현직 부장. 김종필이 국무총리에 취임(6 4)한 직후다. 5대 부장 김계원은 당시 대만대사로 나가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이후락 부장은 이 자리에서 중정 출신 국회의원이 13이라고 말했다.

 

형식적으로는 북한 및 해외 관련 정보 업무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 군을 포함한 정부의 정보 수사활동을 조정·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김종필의 독주와 주요 보직을 사실상 독차지한 육사 8기의 전횡에 육사 5기가 반발하면서 혁명주체 간에 서로 등을 지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퇴계로 쪽에서 바라본 남산 중앙정보부 본청 전경. 왼쪽 안테나가 솟은 본관 건물 밑이 그 유명한 지하실이다. 1995국가안전기획부가 서초구로 이전하고, 남산 르네상스 계획을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