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13일

조선체육회 창립

산풀내음 2017. 6. 6. 19:35

19207 13,

조선체육회 창립

 

보라 하늘의 푸른 솔과 대지에 일어선 높은 산을! (중략) 우리 조선사회에 개개의 운동단체가 없음은 아니나 이를 후원하며 장려하여 조선인민의 생명을 원숙 창달하는 사회적 통일적 기관이 없음은 실로 유감이고 또한 민족의 수치로다. 우리는 이에 뜻한 바 있어 조선체육회를 발기 하오니 조선사회의 동지들은 모두 와서 찬양할진저.

 

1920 713일 오후 8시 서울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발족한 조선체육회의 창립취지서다.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

 

1919 2월 조선총독부 산하 어용단체로 조선체육협회가 출범하였고, 3.1 만세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취되고 있는 가운데 조선체육회 창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몇몇 인사들은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발기인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준비위가 내세운 발기인의 첫 번째 조건은 '친일 색채가 없는 인물'이었다. 엄격한 선정 과정을 거쳐 조선체육회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93명의 직업은 기자, 교사, 의사, 실업인, 은행가, 변호사, 학생, 야구인, 축구인 등으로 다양하다. 그만큼 조선 체육을 집대성할 단체에 대한 각계각층 민족 구성원의 염원이 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 체육인들은 일본인 조직인 조선체육협회와 차별화된 조선체육회를 창립해 체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불어넣고자 했다. 그래서 창립 이념은 ‘건민’과 ‘저항’이다.

 

장두현(18741938)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한 조선 체육회는 처음으로 그 해 11 4일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는 전국체전의 효시가 되었다. 창립 2년째인 1921년에는 정구대회, 육상대회, 빙상대회 등 다양한 체련의 장을 마련, 민족 투혼을 살렸다. 활발한 체육 장려 분위기에서 육성된 손기정은 비록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지만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민족의 기상을 만방에 알렸다.

 

1920 1회 전조선야구대회 우승깃발을 들고 있는 배제

1920년대 조선의 농구 선수들

 

창립 후 1년간 사무실도 없이 술집 등에서 모임을 가졌던 조선체육회는 1921년 고원훈 보성전문학교장을 2대 회장으로 뽑고 난 뒤 보성전문 사무실에 체육회 책상을 마련할 수 있었다.

 

스포츠를 통해 민족 자긍심을 키우고, 항일투쟁을 펼치던 조선체육회는 유억겸 10대 회장이 재임하던 1938 74일 조선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체육협회에 강제 통합돼 해산되고 만다. 조선체육회는 1945년 광복 후 민족지도자 여운형 회장을 중심으로 부활한 뒤 1948년 이름을 대한체육회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체육회가 다져놓은 우리 체육의 든든한 밑바탕은 한국이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하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됐다. 1966 6월에는 태릉선수촌이 건립됐고 레슬링의 양정모는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해방 이후 첫 금메달을 따는 영광을 안았다. 1988년에는 우리나라가 제24회 서울 하계올림픽을 개최해 국가 자존심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