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3일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산풀내음 2017. 6. 16. 20:20

19367 23,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한국형 최루극`의 원조 `홍도야 우지마라`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이었던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에 의해 1936 7 23일부터 31일까지 초연됐다. 가난했던 시절, 비극적인 홍도의 삶에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셨고, 몰려든 인파로 극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부잣집 아들인 광호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만, 결국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남편의 약혼녀까지 살해한 뒤 순사가 된 오빠에게 잡혀가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여주인공 홍도 역에는 차홍녀, 홍도의 오빠 철수 역은 황철, 남편 광호 역은 심영이 맡았다. 한 많은 여인의 기구한 일생’은 당시 가장 중요한 관객층이었던 화류계 여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연극의 성공은 기생들의 집단관람과 ‘입소문’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한다.

 

동양극장, 객석 600여석으로 1935 10월 준공되었다고 11 1일 개관공연의 막을 열면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황철()과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 단원들()

 

"홍도야 우지마라"는 유랑 극단들이 나중에 임의로 지은 이름이었고, 첫공연 때의 제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희곡 원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였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30년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대중 신파극의 상징이 됐고, 1938년에는 법정에 선 홍도가 오빠의 변론으로 무죄선고를 받게 되는 후속 편까지 제작됐다. 나아가 1940년에는 김영춘이 노래하고 콜롬비아 레코드가 제작한 레코드가 만들어져 10만장이나 팔렸다.

 

극작가 임선규는 폐결핵으로 병상에 누워 이 작품을 집필했다. 임선규는 일제강점기 최고 인기배우 문예봉의 남편이다. 문예봉은 1932 16세의 나이로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에 출연해 일약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됐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문예봉의 인기는 신문 학예면(문화면)을 끊임없이 달구었고 거리에서 우연히 친구 아이를 안고 있어도 그의 "모성애"가 회자될 정도였다. 그는 "3천만의 연인"이었다.

 

문예봉(1917 ~ 1999)

 

임선규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데뷔작 ‘수풍령’이 민족주의 성향이 짙다 하여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1940년대에 이르러 부부는 친일(親日)로 돌아선다. 광복된 뒤 그는 절필하다시피 했으나 친일 행적은 멍에였다. 1946 11월 그는 남로당 창당대회에 모습을 나타냈고 결국 1948년에 문예봉과 함께 월북했다.

 

북한에서의 임선규의 삶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 문예봉의 행적은 비교적 소상하다. 월북 이듬해 문예봉은 북한의 첫 혁명 극영화내고향에서 혁명가의 아내역으로 출연했고, 1952년에는 북한 최초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납북된 이광수의 전향을 위해 문예봉의 미모가 동원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그도 남로당 숙청과 "피바다예술"의 본격적인 대두로 인해 북한 무대예술계에서 한동안 모습을 감춘다. 청순미와 조선적 여성미가 더해진 애상적인 이미지가 항일빨치산 혁명예술에서 투사의 역할을 하는 데는 결함이 되었다. 문예봉은 1965년 잡지 조선영화에서 나운규를 "천재적인 예술가이며 정열적인 인간"으로 묘사한 수필이 화근이 돼 반혁명반동으로 몰려 안주협동농장으로 추방된다. 나운규는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신출내기였던 문예봉의 연기를 탄탄하고 개성적인 연기로 뒷받침 해준, 자신에게는 "선생님"과 같은 존재였다.

 

임선규도 당시 서울에서부터 앓았던 폐결핵이 악화되고 당 방침에 맞는 작품을 써 내지 못해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문예봉과 별거 상태로 주을 온천부근의 결핵 환자 요양소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0년 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예봉은 1980년 춘향전의 월매역으로 복귀하면서 복권되었다.

 

문예봉의 복권은 나운규와 영화아리랑의 복권과 상관관계를 갖는 듯하다, 1970년만 해도 나운규는 북한 문예사전에 "사상성없는 퇴폐주의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감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993년 문학예술사전은 아리랑에 대해 "부족점은 있으나 당시 인민들의 지향과 농촌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영화적 형상수법을 혁신한 비판적 사실주의 영화"로 평가하고 있다.

 

문예봉은 1982년 김일성 70회 생일을 맞아 배우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인민배우"가 되었고 국기 훈장 제1급을 받았다. 4남매와 13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던 그는 안정적인 삶을 누리다 1999 3 26일 사망했다.

 

영화 홍도야 울지마라 포스터, 감독; 전택이 주연; 신영균 김지미 이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