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7월/7월 28일

제1차 사법파동

산풀내음 2017. 6. 18. 21:29

19717 28,

1차 사법파동

 

1차 사법파동은 박정희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한 직후 일어났다. 3선 개헌을 통해 당내 도전세력을 제거하고 1971 4월 대선에서 승리해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박정희 대통령은 곧바로 종신집권 체제 구축에 나섰다. 하지만 사법부가 거치적거렸다.

 

1971 7 28일 새벽, 서울지법 당직 판사실에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피의자는 같은 법원 형사부의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이었다. 청구 이유는 ‘직무와 관련한 뇌물수수’로 증인조사를 위해 출장을 가면서 변호사에게서 교통비와 숙식비로 97000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형사사건에서 검증(檢證)을 신청한 변호인 측이 비용을 대는 것은 관행이었으나, 이 부장판사는 검찰에 ‘미운 털’이 박힌 터였다. 시국 공안사범에 대해 잇따라 무죄판결을 내렸으니, ‘소신 법관’에 대한 ‘정치 검찰’의 보복이었다. 영장은 기각되었지만,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이 무더기로 집단사표를 냈다.

 

이튿날 검찰이 다시 영장을 청구하자 그리고 검사가 이 부장판사에게 미행까지 붙인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 판사 415명 중 153명이 사표를 내던졌다. 이렇듯 제1차 사법파동은 검찰과 법원간의 미묘한 갈등 속에서 터져 나왔다.

 

1971 7 28일 ‘항응접대’를 이유로 이범렬 부장판사 등의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형사지법 판사 42명 가운데 37명이 일괄사표를 쓰고 있다.

 

법원이 ‘신민당사 농성사건’ 피고인 10명 전원과 월간 ‘다리지() 사건’ 피고인 3명 등 시국공안사범에 무죄를 선고한 게 그 얼마 전이었다. 기꺼이 ‘권력의 시녀’를 자임했던 검찰은 심기가 불편했다. 허나 검찰의 뜻만은 아니었다. 특히 이범렬 부장판사의 경우 1971 17월 유죄가 선고된 19건에 대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으며 반공법 위반사건 5건에 대해서도 무죄 또는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사건의 가장 큰 발단은1971 6월 대법원이 군인과 군속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국가배상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었다. 그것은 헌정사상 획기적인 판결이었지만 혁명정부의 ‘비상입법’에 제동을 걸었으니 박정희는 격노했던 것이었다.

 

1971년 당시 헌법은 제26조에서 국가배상청구권을 규정했다. 즉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입은 국민은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배상청구권을 구체화하기 위한 법인 국가배상법은 제2 1항 단서에서 피해자가 군인·군속 등 특수신분인 경우에는 국가배상청구권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다. 이 조항의 위헌 결정을 막기 위해 위헌 결정의 정족수를 대법관 전원의 2/3 이상 출석과 2/3 이상 찬성으로 가중하는 법원조직법까지 통과시켰지만 대법원은 우선 이 법원조직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하는 패기를 보였다. 대법원에 따르면 합의정족수를 제한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헌법 자체에서 규정해야 하고, 헌법의 근거 없이 법원의 심사권을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제2 1항 단서조항을 인간의 존엄, 평등권, 국가배상청구권에 반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했다.

 

국회에서도 난리가 났다. 법무부 장관을 불러 밤늦게까지 질의를 했다.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7 30일 서울형사지법 유태흥 수석부장판사와 서울민사지법 박승호 수석부장판사가 공동 명의로 그 동안 검찰이 사법권을 얼마나 침해했는지를 조목조목 나열하는 성명서를 내자 국민들도 충격을 받았다. 성명서 내용은 이랬다.

 

“그동안 검찰은 1.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검찰과 견해를 달리한 판사를 용공분자로 단정, 심리적 압력을 가했으며 2. 행정부에서 관심이 있는 사건을 맡은 검사가 담당 판사에게 자신의 명맥이 달려 있다며 판결 내용을 미리 알려 달라 하고,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판사실에 도청장치까지 했으며 3. 무죄가 선고되면 판사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판사의) 예금통장까지 조사했으며 4. 도청, 미행, 사찰 등을 통해 판사들을 함정 수사했고 5.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직접 판사실에 찾아와 발부를 강요했으며 6. 법원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진상조사를 하기도 전에 판사를 피의자 취급해 모욕 협박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7. 이번 (이 판사) 사건에서도 미행, 함정수사, 피의사실 공표, 영장 계속 신청 등 기존에 해온 사법부에 대한 위협을 해왔다.

 

사태가 좀처럼 가라 않지 않고 여론까지 나쁘게 돌아가자 박 대통령은 신직수 법무장관을 불러 사건을 확대하지 말도록 지시하며 이 판사 등에 대한 수사를 중지시켰다. 신 장관이 민복기 대법원장 집을 찾아 수사 백지화 등 수습방안을 제시하였고, 판사들도 8 27일 사표제출을 철회함으로써 파동은 일단락되었다.

 

8 27일 재경 법관회의에서 사표 철회 결의와 함께 판사들이 민복기(왼쪽) 대법원장에게 대통령을 상대로 사법부 독립 약속을 받아야 한다며 결단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이후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이범렬 부장판사는 파동이 마무리 된 뒤 면직되었고 사법파동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송명관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은 대전지방법원장으로 좌천되었다가 면직되었다. 소장파 판사로 사법권 독립과 검찰 측의 인책 요구에 앞장섰던 홍성우, 김공식 두 판사도 사표를 제출하였다. 반면 검찰 측 관계자는 잠시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1년도 되지 않아 청와대 등 주요 요직으로 복귀하였다.

 

1972유신헌법이 제정되자 박정희 정권은 사법 파동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사법부의 독립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헌법위원회를 만들어 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권을 박탈하였고 대통령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포함한 법관의 파면과 임용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1973년 법원조직법을 개정하여 기존의 모든 법관들을 재임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 대한 위헌 의견을 낸 대법관 9명이 재임용에서 탈락하였고 김대중 대통령 후보 폭발물 사건에서 피의자를 석방했던 백종무 판사, 신민당사 사건의 양헌 판사, '다리' 지 사건의 목요상 판사 등이 면직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법 파동의 실패 이후 법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법 파동 전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도 법원을 어려워하는 편이었고 법원도 중앙정보부나 경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서 할 것을 못 한다든가 하는 분위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사법 파동의 실패 이후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 직원들이 법원에 상주하며 재판에 간섭하기까지 했다.

 

1988 6월 소장판사 430여 명이 집단 성명에 참가한 2차 사법 파동으로 사퇴한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이 잔무를 처리한 후 대법원 청사를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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