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3일

박열, 일왕 암살음모로 피검

산풀내음 2016. 8. 11. 21:52

1923 9 3,

박열, 일왕 암살음모로 피검

 

박열(1902 2월 3 ~ 1974 1월 17)1923 4 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직접행동의 기회를 노리던 중, 일왕 다이쇼히로히토 왕세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로 그의 동거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자체가 과장,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1926325일 도쿄 대심원 대법정에서 증거도 없고, 폭발물 테러의 대상과 날짜도 명시하지 못한 허술한 기소였지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퇴정하는 판사를 향해 박열은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외쳤다. 가네코 후미코는 "만세"를 외치며 천황제 국가 일본을 조롱했다.

 

박열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일본으로 넘어간 박열은 1921 11 29일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하였다. 흑도회에서는 흑도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항일 운동을 진행하였으며, 조선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착취와 학대로 다수가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군중을 모아서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박열은 1922 12월경 흑우회를 조직하였다. 흑우회 멤버들은 곧 사무실 내에 민중운동사를 세우고 1923 5월경 기관지 민중운동을 발간하였다. 순수 조선문으로 발간된 이 월간 사상잡지의 발행을 했다. 일본에서 조선문으로 된 잡지 발행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1923 4월에는 불령사를 조직하였고 9월에 일왕 폭살 기도로 체포되었고 1926 3월 사형선고를 받은 후 같은 해 4월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해방으로 1945 10월 석방되었고 그때까지 22 2개월 간의 옥살이를 했다. 함께 체포된 가네코는 그 해 7월 의문의 자살을 하였다.

 

석방 후 그는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전신)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이때 저서로신조선혁명론’(1946)을 남겼고, 이승만 노선을 지지했다.

그리고 김구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 후 1947 6월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1947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했다. 민단은 1948년 남한 정부수립 직후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 민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 귀국했다가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고 1974년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고 조선에서 6년간 생활하며 식민지인들의 아픔을 체험한 뒤 아나키즘에 경도됐다. 그는 박열과 동거하며 조선의 해방과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다 스물셋의 나이에 옥중에서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쳤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구와 박열 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이 박열 선생


1968, 대동강변을 배경으로 찍은 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