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2일

간첩 김정제 검거

산풀내음 2017. 7. 15. 18:38

19578 22,

간첩 김정제 검거

 

1957 7 30일 밤11시경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해안을 경비하던 경찰 2명이 한 여행객을 검문했다. 소지품은 치약과 칫솔뿐이었지만 치약이 이상하게 딱딱했다. 칼로 찢어본 결과 미화 8천 달러와 암호문이 나왔다. 여행객은 한영창이라는 간첩으로 밝혀졌고 당시 접선 대상자가 수감 중에 있었던 간첩 임주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주홍을 조사한 결과 배후에 놀랍게도 전 치안국 경무과장이었던 김정제임이 드러났다. 간첩 한영창이 도망갈 있도록 풀어 주어 그와 접선하기를 기다려 한영창의 집에서 만나는 것을 모두 검거하였다. 한영창의 집에서는 암호문·무전기·권총 등이 압수되었고, 그는 겨울 사형되었다.

 

김정제는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해 30세에 경기도 파주군과 양주군 군수를 역임했다. 광복 후엔 동대문경찰서장 치안국 보안과장을 거쳐 1946 3월부터 10월까지 치안국 경무과장을 지냈다. 그는 치안국 경무과장 때 좌익분자들을 교묘하게 감싸주다가 검거됐고 형무소에 수감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탈옥하여 신분을 위장한 채 정계에 발을 넓혔다.

 

김정제는 9·28수복 때 월북해 밀봉교육을 받고 1950 10 26일 남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 후 남로당과의 인연을 청산한 것처럼 위장하고 1951 1·4후퇴 때 부산으로 남하하여 본격적인 공작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의 집권당이던 자유당의 간부들과 교류, 정치·군사·경제 분야의 기밀을 탐지하고 과거 친히 알던 경찰 종사자들을 통하여 대남공작원들이 검거된 상황을 일일이 북한에 보고하는 한편, 북한에서 파송한 공작 연락원 한영창, 조돌용 등과 접선, 구체적인 공작 지령을 접수하여 그 결과를 무전으로 보고하였다.

 

1953 10월에는 북한으로부터 공작금 3천 달러를 받은 바 있으며, 1956년 여름 10여 년에 걸친 그의 활동을 평가 받아 북한의 초청으로 월북하여 약 1개월간 있으면서 북한 공산정권으로부터국기훈장 2을 받았다. 그의 위장된 정치권 활동은 야당인 진보당과 민주당의 고위 간부들에게까지 손을 뻗쳤고, 자유당에서는 중앙위원으로 추천 받아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 찬조 연사로도 활약하였다.

 

1957 822일 체포되었을 당시 ‘대한대형선주협회 전무이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으며 그가 간첩활동의 대상으로 삼아 평소 긴밀히 접촉했던 인사는 장관급, 국회의원 및 각 정당의 간부 등 고위층 인사가 50여 명에 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