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30일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 평양서 개막

산풀내음 2017. 7. 23. 08:29

19728 30,

1차 남북적십자회담 평양서 개막

 

1972 8 30일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렸다. 4 5일동 안의 평양회담은 양측 수석대표의 개회사와 북한측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축사 그리고 본회담 의제를 공식으로 채택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1차 남북적십자회담 (평양)

8 31일 평양 관광

 

남북의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쌍방간의 적십자회담은 1971 8 1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 최두선이 제의하고 북한적십자사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성립되었다. 1971 9 20 1차 예비회담을 개최하여 판문점 상설연락사무소 및 직통전화 설치를 합의한 후에 1972 8 12일까지 25차 예비회담에서 18개의 절차합의를 할 때까지 예비회담은 만 1년 동안 계속 되었다.

 

1차 예비회담

 

회담 중에 논란이 되었던 것은 본회담 의제 및 장소와 시기, 대표단 구성에 대한 문제였다. 남측은 본회담 의제로는 남북이산가족의 생사 및 소재확인 그리고 소식전달과 이들의 서신교환, 재회알선 및 상호방문, 재결합 등 기타 부수적인 문제 등을 제의하였다. 하지만 북측은 1차 회담 때부터 가족, 친척, 친우의 자유내왕 및 상호방문, 이들의 자유로운 서신거래, 이산가족을 찾아주고 상봉시키는 문제 등을 본회담 의제를 들고 나왔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조정을 거쳐 1972 6 16 20차 예비회담에서야 가족과 친척의 소재확인, 방문과 상봉, 서신거래, 재결합 기타 인도적 문제 등 5개항을 본회담 의제로 확정 지었다.

 

본회담의 장소문제는 남측이 서울과 평양으로 하자고 제의하였고, 북측은 판문점을 고집하였다. 3차 회담에서 서울과 평양으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시일 문제는 남측이 예비회담 종결 직전에 결정하자고 한데 반해 북측은 예비회담에서 본회담 의제, 절차문제에 합의가 되기도 전인 1971년 내에 무조건 열자고 주장하였다.

 

이 후 의제가 확정되고 첫 본회담 장소, 절차, 대표단 문제가 완전히 합의도 보기 전인 1972 719일 북측이 다시 거론하고 나와 일단 8 5일 개최키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북측의 무리한 주장에 의해서 불합리하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모든 문제에 최종합의를 본 8 11에서야 1차 본회담을 8 30일 평양에서 개최하고 2차 본회담은 9 13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대표단 구성은 각기 7명의 대표와 7명 이내의 자문위원 및 7명 내외의 수행원 및 지원인원으로 대표단을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마침내 1972 8 30일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렸지만, 1973 7 1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7차 본회담을 끝으로 회담은 별 성과 없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다가 12년만인 1985 5 28 12년 만에 서울에서 8차 본회담을 열고 8 15일을 전후하여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 공연단의 고향방문단을 실현키로 합의, 성사시켰다. 그리고 9 20일 고향방문단 50, 예술공연단 50, 취재기자 30명 등 151명이 각각 서울과 평양에 도착하여 남북 분단 이래 공식적인 이산가족 상봉과 예술 공연단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류는 결국 2000 6 12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