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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사에서 가을을 담다.

산풀내음 2018. 10. 28. 17:46


남루한 법복에서 참 가르침을 느끼다.


'용이 드나드는 산' 혹은 '용이 머무는 산'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문산(龍門山, 1157m)은 본래 '미지산(彌智山)'이라 불렸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미지산은 용문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용문산의 가장 높은 주봉은 가섭봉이며, 가섭봉은 부처님이 가장 아끼던 제자의 이름을 따 붙인 이름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용문사(龍門寺)를 비롯하여 윤필암(潤筆庵)ㆍ상원사(上院寺) 등의 사찰을 품고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용문사(龍門寺)​는 이곳 이외에도 2곳이 더 있다. 경북 예천의 용문사와 경남 남해의 용문사가 그곳이다. 양평의 용문사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고 예천 용문사는 용의 심장 그리고 남해 용문사는 용의 꼬리에 해당한다.

​양평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년)에 대경(大境) 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예천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년) 두운 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가장 먼저 창건된 것으로 전해져 오는 남해 용문사는 사실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보광산(금산)에 창건한 보광사(일명 봉암사)를 그 전신으로 삼고 있다. 조선 현종 원년(1660년)에 백월대사가 지금의 호구산으로 사찰을 옮겼으며 현종 7년(1666년)에 백월대사가 대웅전을 건립하면서 이름을 용문사로 바꾼 것이다.

양평 용문사는 대경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행차하여 직접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번 중창되었고 특히 세조와 인연이 깊다. 세조의 어머니이자 세종의 비였던 소헌왕후가 사망한 후 세조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던 차에 꿈에 모친이 나타나 '나를 위해 불상 2기와 보살상 8위를 조성해 용문사에 모셔라'고 해서, 세조의 명에 의해 대대적인 불사를 하게 됐다.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시대에도 용문사는 고종 30년(1893년) 당시 304칸의 대사찰로 300여 승려가 거처했을 정도로 그 면면히 유지해 왔던 사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순종이 왕위에 오른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나면서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져 버리는 비운을 겪었다. 1909년부터 다시 조금씩 중건되었지만 한국전쟁 때 용문산에서 중공군 2개 사단 병력이 전사했을 정도로 큰 전투가 터지면서 용문사를 비롯 사찰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후에 대웅전, 칠성각, 관음전 등을 다시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뤘다.

1982년 이선걸 스님께서 중창하신 일주문








관음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관음보살좌상.


미소전. 나한이 모셔져 있다.





용의 머리인 양평 용문사에는 용의 조각이 많이 새겨져 있다. 일주문에 4구의 용이 새겨져 있고 대웅전에도 2구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용문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용이 아니라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된 수령 1100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로 알려진 은행나무이다. 높이가 42m, 줄기의 가장 굵은 둘레가 14m에 달한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은 것이 나무가 됐다는 설과 신라 마지막 왕(경순왕)의 아들이었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조선조 세종 때에는 이 나무에 정삼품(正三品)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당상직첩(堂上職牒)의 벼슬이 내려지기도 했다.


정미의병(丁未義兵)이 발발했을 때 일본군이 절에 불을 질렀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해를 면했다고 전해지며, 은행나무는 이때부터 당시 화재로 소실된 사천왕전(四天王殿)을 대신하는 천왕목(天王木)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은행나무는 천왕목 이외에도 호국영목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는 나라의 큰 변란이나 경사가 있을 때 윙윙 소리로 울며 길흉을 예고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종황제가 승하했을 때도 큰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 8.15해방과 6.25전쟁 때도 윙윙 우는 소리를 인근 주민들이 모두 들었다고 한다.

이것 이외에도 용문사 은행나무와 관련하여서는 많이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지하였다 한다. 또한 정미의병 당시 불타지 않은 은행나무를 일본군이 잘라 없애려 톱을 대자 천둥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려 자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듯 신비로운 힘을 가진 은행나무이지만 은행 열매가 떨어지면 아주 지독한 똥냄새가 난다고하여 '똥낭구 엄마'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