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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찾은 여주 신륵사

산풀내음 2018. 12. 26. 22:10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향나무 뒷편으로 신륵사의 주불전인 극락보전이 보인다.


크리스마스 아침, 내가 찾은 곳은 여강(驪江)이라고도 불리워지는 남한강에 자리잡은 신륵사(神勒寺)이다. 신륵사는 고려말 불교 중흥을 위해 힘썼지만, 성리학자들의 음해로 탄핵을 받는 고충을 받으셨고, 신륵사에서 입적(入寂)하시면서 수많은 이적을 남기신 나옹선사의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다.


여강은 남한강 중에서 여주 점동면 삼합리부터 금사면 전북리까지 총 40km에 이르는 물길을 일컫는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듯하고 단지 여주(驪州)시에 자리잡은 물길이라하여 그렇게 불려진 듯하다. 특히 신륵사에서 보는 여강은 고려시대부터 남한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혔다고 한다. 여말선초의 이규보, 이색, 정도전, 권근, 서거정 등이 이곳에서 뱃놀이를 하며 시를 남겼다고 한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륵사는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를 지냈으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시호를 받은 고승 나옹화상(懶翁和尙)께서 입적한 곳으로 그의 제자들과 후원자들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남한강변에 있던 쇠락한 여러 사찰들과는 달리 예종 때(1469년)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옮겨질 때 능을 지키는 원찰의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즉 신륵사는 세종대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자, 영릉에서 제향이 있을 때 제사 음식을 담당하기 위한 사찰의 역할을 한 셈이다.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출처: 신륵사>

여주박물관과 도자기 체험장 등이 있는 신륵사 관광단지를 지나면 남한 강변에 고즈넉하게 신륵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일주문과 불이문을 지나면 나옹선사의 지팡이가 싹터 자랐다는 은행나무와 무학대사가 심었다는 종향나무가 있다. 은행나무의 왼편으로는 신륵사의 주불전인 극락보전 등 전각들이 위치해 있으며, 오른편 즉 남한강변에는 고려시대 제작된 전탑 등이 있다. 경내에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중앙에 버티고 있다.

신륵사에는 문화재도 즐비하다.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보제존자석등(보물 제231호), 조사당(보물 제180호) 등 보물이 7점이나 된다.


일주문의 현판에 따르면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라고 한다. 아주 낮은 구릉(丘陵) 정도라 할 것이지만 산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에 다소 의아했다.​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는 신륵사의 중심 불전이다. 숙종 4년(1678년)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년)에 수리를 시작하여 정조 24년(1800년)에 완공되었다.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791호)은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원문에 따르면 1610년에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에 의해 제작되었다. 아미타불 옆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또한 극락보전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 구전되어 오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현판이 있다.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신륵사에는 세개의 석탑이 있고 그 중에 하나. 극락보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신라나 고려시대에 성행한 석탑의 조형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세부양식은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고 상륜부 역시 결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현재보다는 몇 층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180호). 극락보전 뒷편의 넓은 공간에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 조사당이 있다. 이곳은 지공, 나옹, 무학 3화상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분은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불교계의 빛이 되었던 분들이다. 

명부전과 봉송각(왼편의 작은 전각)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봉송각에 모셔진 부처님. 명부전 옆에는 봉송각이 있다. 봉송각은 49제 등 제를 모신 후 영가분들이 극락왕생하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이다.

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 조사당 뒤편 낮은 언덕을 오르면 보제존자(나옹화상)의 석종형 부도와 석종비, 석등이 있는 부도전이 나온다. 나옹선사의 법구는 가까운 여강(남한강)에서 다비를 했는데 사리가 155과가 나왔다 한다. 그런데 제자들이 계속해서 염불하니 사리는 558과로 나누여 졌다고 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라는 시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옹 혜근(懶翁 慧勤, 1320~1376, 나옹은 호이며 혜근은 법명이다)은 이미 7세에 서역의 고승 지공 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았고, 20세 때 친구의 죽음에 무상을 느끼고 불문에 귀의하였다. 문경 묘적암에서 요연 선사를 은사로 “삼계고해에서 해탈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각오로 입산한 스님은 몇 해 뒤 양주 회암사로 옮겨 4년간의 처절한 정진 끝에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충목왕 3년(1347년)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에 머물며 그곳에서 인도스님 지공(指空)의 지도를 받았다. 중국 황제까지도 찬탄을 마지않았던 나옹 스님은 10년간의 중국 순례를 마치고 ​공민왕 7년(1358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에 은신하였으나, “스님께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도 불법에서 물러나리라”는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요청에 신광사에 머물었고, 당시 홍건적의 침입 때 의연한 태도로 절에 남아 적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기도 했다. 하지만 ​2년간 신광사에 머물던 스님은 결국 왕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천을 주유하며 인연 따라 법을 설했다.

특히 만년에는 경기도 양주에 회암사 중창에 온 전력을 기울였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왕사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우왕 2년(1376년)에 회암사 낙성(落城)을 축하하는 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임 것을 가지고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료들이 이를 빌미로 혜근을 탄핵하여 혜근은 밀양시의 영원사(靈源寺)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병이 도져, 한강에 이르렀을 때 호송 관원이었던 탁첨(卓詹)에게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 뱃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결국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7일 만에 여흥(驪興: 현 여주시)에 도착해 신륵사에 머물렀다. 탁첨(卓詹)이 재촉해 다시 떠나자고 말했지만 떠나지 않고 “노승은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불사를 지으리라”며 음력 5월 15일 진시(辰時: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조용히 입적(入寂)했다. 이때 오색 구름이 산을 덮었고 수많은 사리가 나와 이를 씻을 때 구름도 없이 그곳에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나옹 어록

“만일 그대가 이 일을 궁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승속에도 있지 않고 남녀에도 관계 없으며 초참 후학에도 관계없고 또 여러 생의 구습에도 있지 않는 것이오. 오직 당자의 한 생각의 진실한 결정적인 믿음에 있는 것이오. 그대가 이미 그렇게 믿었거든 다만 24시간 동안 언제나 화두를 드시오. (그러다보면 반드시) 잠자코 스스로 머리를 끄덕거릴 것이오.” (나옹집 중)

‘산하대지가 눈앞의 헛그림자요 만상삼라도 또한 그러하다. 자성이 원래 청정함을 알면 하나하나 모든 것이 법왕신이로다./ 못 깨달으면 산하는 내가 아니요 깨달으면 모든 것이 한 몸이로다. 깨닫고 못 깨달음 모두 부수면 새벽마다 닭은 오경에 운다.’ (나옹집 중)

‘한 생각 잊을 때 밝음 나타나/ 아미타불 다른 곳에 있지 않나니/ 온 몸이 앉거나 눕거나 바로 연화국이니/ 어느 곳 극락당 아닌 데 어디 있으리./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이를 얻어 부디 잊지 말아라/ 생각이 다하여 무념(無念)의 곳 이르면/ 네 몸에서 부처의 빛 절로 일리라.’ (나옹집 중)

‘해진 옷 한 벌에 여윈 지팡이 하나/ 천하를 횡행해도 걸릴 데 없네/ 강호를 돌아다니며 무엇을 얻었던가/ 원래로 다만 배운 것 빈궁뿐이네.’ (나옹집 백납가 중)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관음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명부전과 조사당이 나온다.


은행나무에 나투하신 관세음보살. 

나옹선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로 나옹선사께서 1376년에 입적을 하셨으니 은행나무의 수령은 640년이 넘은 것이 된다. 선사는 지팡이를 꽂으면서 '이 나무가 살면 후일 내가 죽어도 살 것이고, 만일 이 나무가 죽으면 나는 아주 죽은 것과 같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옹선사의 은행나무는 불, 법, 승 삼보를 상징하듯이 세줄기의 가지로 모습을 갖추어졌고 그 중 한줄기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띄고 있다. 나옹선사의 제자, 무학대사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豚眼只有豚 佛眼只有佛(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다층석탑(보물 제226호).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 제작된 전탑으로 신라시대 형식을 계승했다. 전탑은 벽돌을 구워 탑을 쌓은 것으로 주로 중국의 탑들이 여기에 속한다. 당시 이 탑은 강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근 지역의 물길이 거셈을 알리는 등대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시대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조선 영조 2년(1726년)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나옹선사를 다비했다고 전하는 강변에는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 서 있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강월헌은 나옹선사의 또 다른 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