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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구룡사를 찾아서 ...

산풀내음 2019. 6. 15. 17:22



금요일에 내린 비로 더더욱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오늘은 어디를 갈까하는 고민 중에 머리에 떠오른 곳은 치악산 상원사와 구룡사였다. 가장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은 구룡사에서 시작하여 세렴폭포를 지나 비로봉에 오른 후 남대봉해서 상원사에 들린 훈 성남리 방면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능력으로서는 혼자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듯하여 오늘은 그냥 구룡사와 세렴폭포를 다녀오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산세가 웅장하고 구룡사, 상원사 등 많은 사찰을 품고 있는 치악산는 1973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4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본래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하여 '적악산(赤岳山)'이라 했는데 꿩이 목숨을 구해준 선비의 은혜를 갚고자 머리로 상원사 종을 쳤다는 전설 때문에 꿩 '치(雉)'자를 넣어 치악산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치악산은 과거에 나라에서 벌목을 금하며 관리를 보내 직접 관리하는 '봉산(封山)'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구룡사매표소를 지나면 왼쪽 산비탈 쪽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황장금표(黃腸禁標)'가 있다고 한다. 사실 매표소를 지나치면서 잠깐 살펴 보았는데 보지는 못했다.

* 황장금표란 백성이 황장목을 함부로 벨 수 없다는 경고를 표식해 놓은 것으로 1750년께 세운 것이란다. 

황장목은 연륜(年輪)이 오래된 소나무로 속이 누런빛을 띠는 질 좋은 소나무로서 목질(木質)이 양호하여 관곽(棺槨)을 만드는 데 적합한 목재. 임금의 관인 재궁(梓宮)을 만들거나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하기 위해 특별히 관리했던 소나무를 일컫는다. 우리에게는 '금강송' 또는 '금강소나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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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에는 수령 100~200년 된 금강소나무 7만 5,000 그루가 산다. 치악산 국립공원은 2013년 6월 치악산 북쪽 자락인 구룡지구에 ‘금강소나무 숲길’을 열었다. 구룡 매표소에서 구룡사까지 1,1㎞에 이르는 짧은 길이지만 계곡의 물소리를 들어며 걷는 그 길은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었다. 국내 최대의 금강소나무 군락지인 경북 울진 소광리 일대에 버금가는 숲길이라고 자랑한다.



금강소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구룡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한자로 거불 구(龜)​자를 사용하여 龜龍寺라고 하지만 본래는 아혼 구(九)를 사용하는 구룡사(九龍寺)였고, 또한 사찰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홉 마리의 용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사찰이기에 상당한 규모의 사찰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는 작고 아담한 사찰이었다.​





구룡사(龜龍寺)는 신라 문무왕 8년(668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에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아홉 구(九)'를 사용하는 구룡사(九龍寺)였다. 이렇게 이름이 붙혀진 것에는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저 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대사는 강원도 원주 일대에 도량을 건립하리라는 마음을 먹고 터를 물색하던 중, 치악산 구룡골에 접어들게 된다. 이곳에서 '천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영험한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을 풀어 놓은 듯한 형상을 한 명당'을 발견하게 되는데, 문제는 대웅전이 위치해야 할 자리에 큰 연못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이곳에 오래전부터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아홉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의상대사가 연못을 없애려고 하였지만, 이곳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의 강력한 저항으로 그 뜻을 이루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결국 의상대사와 아홈 마리의 용은 내기를 해서 이긴 자의 뜻대로 하기로 하였다.


먼저 용들은 연못에서 날아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과 함께 우박 같은 장대비를 쏟아 부었다. 삽시간에 계곡이 넘쳤다. 용들은 이 물난리에 의상대사가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용들의 간괴를 미리 간파한 의상대사는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띄워 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음은 의상대사의 차례였다. 단잠에서 깨어난 의상대사는 부적 한 장을 써서 용들이 살고 있는 곳에 던졌는데, 갑자기 연못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도 떠거워진 물의 온도에 용들은 참지를 못하고 급히 동해바다로 달아났다. 급하게 꿈틀거리며 달아나면서 구룡사 앞에는 여덟 개의 꼴짜기가 생겨났다. 아홉 마리 중에 눈이 멀어 미쳐 달아나지 못한 한 마리의 용은 대웅전 옆의 못에 숨어 들었는데 훗날 이 용은 장마를 만나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가 바로 구룡소라는 곳이라고 한다.


이후 의상대사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건립한 뒤 '아홉 마리의 용이 산 곳'이라는 의미에서 구룡사(九龍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구룡사 대웅전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보존돼 오던 중 2003년 9월 화재로 전소됐으나 강원도가 2004년 11월 5일 건축물 세부 사항에 대해 미리 제작해 놓은 실측보고서를 토대로 전통 불교양식에 맞게 원형으로 복원이 되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구룡사는 일반적으로 신라 문무왕 6년, 즉 66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의상대사는 661년에 당나라고 가서 670년에 신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66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은 당시 의상대사의 유명세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 한편 『치악산구룡사사적』에 따르면 구룡사는 신라말의 고승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를 떠나, 구룡사(九龍寺)는 조선 중기에 구룡사(龜龍寺)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이것과 관련하여서도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수도도량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구룡사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숭유억불 정책으로 쇠락하기 시작한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당시 왕실에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을 공출하자 구룡사 스님들이 그 책임을 맡았고 공출 과정에서 뇌물이 오고가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민중은 점점 구룡사를 멀리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쇠락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한 노승이 나타나 "구룡사는 수량도량으로서 운이 다 되었으니, 스님들은 하루빨리 절을 떠나라"고 한다. 그러자 구룡사 스님들이 이를 해결할 방법을 물었고, 노승은 "지금의 어려움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저 바위를 없애버리면 쇠락이 멈출 것이오"라고 했다. 

구룡사 스님들은 노승의 말대로 석공을 불러 거북바위를 반으로 쪼개었지만, 사찰의 기운은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또다른 노스님이 사찰을 지나가다가 구룡사에 들러 지난 번의 스님의 말과는 달리 "원래 이 사찰의 기운은 절 앞에 있었던 거북바위가 지켜주고 있었는데, 그 바위를 쪼개 혈맥을 끊어 버렸으니 운이 막혀 버렸소"라고 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북 바위 대신 사찰의 이름에 거북을 살려서 구룡사(龜龍寺)로 하면 분명이 효과가 있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주지스님은 노스림이 시키는 대로 사찰명을 구룡사(九龍寺)에서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고 이후 구룡사의 사세는 점점 살아났다는 것이다.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후 1706년(숙종 32) 중수되었다. 근래에서는 1966년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대웅전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좌측에 지장전이 있고 우측에 관음전과 나한전이 있다.



구룡사는 관음기도처로도 유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불광미디어('구룡사와 관세음보살', 2007.12.27)와 BTN 광우스님의 소나무(76회 불보살의 가피는 분명하고 역력하다)에 소개된 2007년 당시 구룡사에 계셨던 하지만 지금은 입적하신 노스님의 신묘한 체험담 들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육이오 나던 해의 일이다. 큰방에 모신 관세음 보살은 내가 아는 한 구룡사와 함께 역사를 같이 해온 부처님이시다. 그 단정미묘한 상호에서 나는 광명과 신기로울만치 자비를 머금으신 미소에서는 정녕 천경만론이 필요없이 말없는 큰 설법으로 우러러 보는 이를 경복하게 한다. 그때의 주지스님이 횡성에 포교당을 짓고 관세음보살을 모셔갔다. 아무리 포교를 위한다고 하기로서니 내 마음은 자비하신 어머니가 말없이 훌쩍 떠난 허전함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주지스님 하시는 일이라 아무말 못하고 날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얼마 있자 주지스님에게 원주군수로부터 출두 요청이 왔다. 원주로 군수를 만나러 갔던 주지스님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그 당시 원주군수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특별한 신암심이 있던 분은 아니였다. 그런데 한번은 꿈에 거룩한 성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구룡사 관세음보살이다. 지금 횡성에 나와 있는데 내가 여기 있을 수 없다. 곧 구룡사로 돌아가야겠다"한다. 꿈을 깬 군수는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하루를 지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또 같은 꿈을 꾸었다. 이러기를 세번이나 거듭하고 보니 군수도 크게 긴장하고 구룡사에 무슨 사고가 난 것으로 직감했다. 주지를 불러 알아보니 원주 군내의 부처님을 무단히 횡성군으로 옮겨갔던 것을 알고 이것을 필시 군수 자신에게 주신 성인의 가호력이라 생각하고 주지를 크게 책망하였다. 그리고 즉시 관세음보살을 본래의 곳으로 모셔 놓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 주지가 7일간 구류를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구룡사에 관세음보살을 옮겨 모신지 사흘만에 횡성 포교당은 폭격을 맞아 전소되고 말았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신도들은 한편 놀라고 한편 다행히 여기면서도 주지에 대한 이의가 분분했다. 그리고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공양금을 모아서 관세음보살 공양답을 장만했었는데 그 때 원주 군수가 크게 협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