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3일

조총련계 재일동포 1차 7백여 명 추석성묘차 모국방문

산풀내음 2016. 8. 19. 22:11

19759 13,

조총련계 재일동포 1 7백여 명 추석성묘차 모국방문

 

30년 만에 고국을 찾은 조총련계 재일동포 700여 명은 고속도로, 조선소, 공업단지 등을 시찰하고 고향을 찾아 성묘하는 일정으로1975 9 13일부터 2주일간의 모국을 방문했다. 모국방문단의 일정은 9 24일 장충단 국립극장에서 열린모국방문단 서울시민 환영대회에서 희극인 김희갑이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르면서 최 절정에 다다랐다.

 

30, 40년간 고향을 떠나 대부분 부모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고향의 부모 산소에 성묘한 재일동포들에게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불초한 이 자식이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비옵니다"라는 가사는 국립극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재일동포들은 대부분 일제시기에 징용·징병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해방 후에도 귀국의 기회를 놓치고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로, 65만 재일동포의 95% 이상이 남한 출신이었으며 그 가운데 68% 정도가 경상도 출신이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분단을 거치면서 재일한국인사회는 재일거류민단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조총련)의 대립 구도로 남북한 이데올로기의 축소판이 되었고 조총련계는 고국을 방문할 수 없었다.

특히 1974 8 15일의 문세광 사건으로 한일관계가 냉랭하였고 국내에서는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청와대에서는 수시로 안보회의가 열릴 정도였다. 또한 1975 4월 베트남 패망으로 안보에 대한 인식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장 김영광은 도리어 조총련계 재인동포의 모국 방문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사업은 북한에 뒤져있던 경제력이 1960년대 말, 1970년대에 이르러 집중적 공업화정책으로 북한을 크게 앞지르기 시작한 경제성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2주일간의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방문 일정에는 현충사, 불국사 등 관광과 함께 울산 현대조선소, 포항제철, 안양 기아산업자동차공장 등 산업시설 시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모국방문사업은 조총련계 재일동포에 대한 회유뿐 아니라 경제성장의 결과를 대내외적으로 홍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가기록원 공개서비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