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3일

베를린 장벽 붕괴를 넘어 완전한 독일 통일

산풀내음 2016. 8. 31. 20:57

199010 3,

베를린 장벽 붕괴를 넘어 완전한 독일 통일

 

1989 8헝가리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의 제한을 풀자 13,000여명의 동독 사람이 같은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한편 1989 10 7, 고르바초프는 동독 건국 40주년을 맞아 동베를린을 찾았다. 당시 동독은 주민들의 저항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시민들은 매주 월요일 거리로 몰려나와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슈타지는 물러가라(Stasi raus!)”고 외쳤다.


이와 같은 동독 월요 시위의 첫 봉기는 1989 9 25, 동독의 공업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8천 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여 대대적인 데모를 별였다. 이것이 바로 독일 통일의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시민들은 월요일마다 시위하며 끈질기게 정부를 괴롭혔다10 9일에는 라이프치히에 무려 7만 명으로 불어났고, 일주일 후인 10 16일에는 12만 명으로 정부 타도를 요구하는 시위가 났다


동독의 공업 도시, 라이프치히의 월요 시위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무력진압작전을 계획했고 이 와중에 고르바초프를 맞게 되었다. 당시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에 의지해 꺼져가는 공산당의 불씨를 되살릴 것을 기대했다. 연단에 오른 호네커는 사회주의 깃발을 더 높이 치켜들고 시위대와 동독 탈출자들을 향해서배신자는 조국을 떠나라며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는 "인생은 늦게 오는 자를 벌한다"는 소련 속담을 인용함과 동시에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동독의 변화와 개혁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1989 10 7일 동독의 건국절 기념식에 초청된 고르바초프()와 에리히 오네크()

 

이보다 앞서 10 6일 고르바초프는 동독 정치국원들과의 회합에서 소련군은 동독시위에 일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주동독 소련대사를 통해 시위의 무력진압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동독 공산정권은 무력진압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정통성 없는 동독체제를 유지시켜 준 것은 소련 탱크의 힘이었는데, 영원할 것 같았던 동맹, 소련으로부터 갑자기 버림받게 되자 동독 공산정권은 더 이상 지탱해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정권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자10 18일 동독 서기장이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1912 8월 25 ~ 1994 5월 29)는 실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1월 베를린 시위에서는 독일 통일의 요구까지 나왔고 11 9일에는 베를린 장벽까지 무너졌다.


 

베를린 장벽 붕괴

 

한편 동유럽에서도 민중화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헝가리에서는 1988 5월 개혁파인 그로스 서기장이 집권했고, 폴란드에서는 1989 4월 자유노조 합법화에 이어 6월 총선에서 동유럽 최초로 비공산당 주도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었다. 체코에서는 1989 11월 공산당의 권력독점이 폐지되고 12 29일에는 반체제 인권운동가인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마니아에서도 그 해 12월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차우세스크 부부가 처형되는 등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에리히 오네커에 이어 에곤 크렌츠(Egon Krenz, 1937- )가 당 서기장 및 총리에 임명되었지만 국민들의 불신임으로 44일 만에 퇴진하였다. 뒤를 이은 한스 모드로프 서기장은 당내 비판 인사답게,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민주개혁 추진했고  1990 3월 18 동독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자유 선거가 실시되어 SED(독일 사회주의통일당) 1당 독재를 폐지시켰다.


 

국민의회에서 연설하는 에곤 크렌츠

 

서독과 동독은 1990 5월 18 경제, 통화, 사회의 통합을 협상하였다. 8월 23 동독 의회는 10월 3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흡수통일(로타어 메지에르동독 총리가 제안)에 동의했으며, 1990 7 1일 경제통일이 실시되어 서독의 독일 마르크로 화폐가 통일되었다. 동독 화폐가 폐지되었고, 구 동독화폐와 구 서독화폐가 새로운 화폐로 교환되었다. 8월 31 양쪽 독일의 대표는통일 조약(Einigungsvertrag)’에 조인했다. 9월 12 독일은 주변국가와 함께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을 조인하면서 공식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았다.

 

마침내 1990 10 3일 오전0시를 기해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합하는 형식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이 새롭게 탄생했다. 미·영·불·소 등 2차 대전 전승 4개국은 이 날짜로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에 대한 모든 권리를 공식포기, 기존의 관할권을 독일에 이양했다.

통일을 주도한 헬무트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1930 - ) 서독총리는 122일 실시된 전 독일 총선에서 승리, 초대 독일총리가 됐다.

 

통일의 순간은 독일인은 물론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옛 제국의회 건물 앞 공화국 광장에는 1백만 명이 운집해 폭죽을 쏘아대는 가운데 흑--황의 대형 독일 국기가 서서히 올라갔고 “통일, 정의, 자유를 조국 통일에...”로 시작되는 독일 국가가 장엄하게 연주되고, 단상에 선 헬무트 콜 총리는 감동과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이윽고 3 0. 군중들은 일제히 ‘도이칠란트’를 외쳐댔다. 그 순간 독일 전역의 교회와 성당은 일제히 종을 울려 통일 독일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렸다.

 


독일 통일이 이뤄진 1990 10 3일 베를린 제국의회 건물 계단에서 헬무트 콜 총리(가운데),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대통령 등이 환호하는 국민에게 답하고 있다.


1990 10월 3, 베를린 구 제국 의사당(Reichstag) 앞에서 통일을 축하하는 독일 시민들, 또한 45년간 동베를린, 서베를린으로 갈라져 있던 베를린시도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