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3일

광주학생 항일운동 발생

산풀내음 2016. 10. 12. 20:19

192911 3,

광주학생 항일운동 발생

 

나주지역은 교통의 요지이면서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토지수탈을 쉬해 일본인 이주민들이 많아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일 학생들 사이에는 항상 갈등과 마찰의 요인이 잠복해 있었다.

마침내 1929 10 30일 나주역에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 학생 박기옥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 당기며 희롱했고, 이를 목격한 사촌동생 광주고보(현 광주제일고) 학생 박준채가 항의하면서 결국 싸움이 되었다. 이 싸움은 집단 난투극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10 30일 나주에서 희롱 당한 여학생들과 박준채

 

1929 11월 3(일요일)은 일본에게는 메이지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明治節)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음력 10 3일 즉,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다. 이에 더하여 1929년의 이 날은 한국 학생들의 비밀결사인 성진회 3주년이기도 해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된 상태였기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 내내 침묵으로 저항했다. 그 결과 한일 학생간에 언쟁이 벌어지고, 일본 학생이 단도로 광주고보 학생의 코를 찌르며 11 3일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에 장재성 등은 일제에 대항할 자세한 행동방향을 제시함과 함께 장재성의 주도로 학생들은 광주농고 학생들과 함께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히 적(일제)을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는 가두시위를 하였다. 일제는 항일시위에 가담한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을 구속, 검사국으로 송치하는 탄압을 자행했다.

 

1929 11 6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광주학생 항일운동 당시 격문을 다룬 기사.

 

11 12일에는 광주고보에서부터 2차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했다. 12일 오전 9시 수업종이 울리는 동시에 광주고보 전교생이 시내로 뛰쳐나와 11 3일에 잡힌 학생들이 있는 광주형무소로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동 도중에 광주여고보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려 했으나 교직원의 제지로 실패했고, 이어서 광주역 앞에 도착하자 한일 학생간의 두 번째 싸움이 일어났다.

 

3일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일본 경찰의 편파적인 대응과 체포에 의해 격분한 학생들은 다음날부터 동맹휴학을 실시했으며, 일제는 이에 맞대응해 학교를 휴교시켜버리는 등 사태는 점차 확대되었다. 나아가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는 1930 1 9일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백지동맹사건을 일으키며 국민적 관심을 끌어내게 되었고, 이는 서울로까지 학생시위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초기의 격양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을 조직해 광주학생운동을 이끌어 나간 것은 성진회, 독서회, 소녀회 등의 학생비밀결사였다. 성진회는 광주고보생 왕재일이 1927년 무등산 중머리재에서 학생들을 모아 만든 사회과학결사로 사회주의 연구를 주로 실시하는 단체였다. 이는 추후 독서회와 소녀회 결사의 기반이 되어 학생운동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일본인 학생들의 한국 여학생 희롱과 집단충돌사건이 발단이 된 광주학생운동의 항거의 불길은 인근 전남지역에 이어 그 해 12월 초에는 서울의 대규모 학생시위로 번져 갔으며 개성, 인천, 원산, 평양, 함흥, 공주 등 전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돼 나갔다.

 

투쟁형태도 시험거부, 동맹휴학, 격문살포, 가두시위 등 다양하게 전개됐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은 모두 194개 학교(전문학교 4, 중등학교 136, 보통학교 54)에서 학생 54천 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었다.

그리고 1953년부터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날을 기념해 매년 11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