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4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극

산풀내음 2016. 10. 12. 20:25

197911 4,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극

 

미국의 팔레비 독재 왕정의 지원은 이란 내 반미감정을 점점 키워나갔다. 그리고 1978년 들어 팔레비 국왕에 대한 반발이 이란 곳곳에서 거세게 몰아쳤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등은 연일 팔레비의 퇴진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였고, 평생의 정적 호메이니도 망명지에서 총궐기를 촉구했다. 결국 팔레비가 1979 1월 휴양을 핑계로 멕시코로 망명했고, 2 1일에는 호메이니가 망명 15년 만에 귀국함으로써 이란에 불어 닥친 이슬람혁명도 결실을 맺었다.

 

팔레비()와 호메이니 지지 민중 봉기()

 

호메이니는 바크티아르 과도 정부를 붕괴시키고 6월 신권적(神權的) 지배 곧 종교가 다스리는 나라(신정국가)인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 카터가 도망간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의 미국 입국을 신병 치료를 이유로 10월에 허용하였고 이를 미국의 망명허가로 해석한 이란은 미국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팔레비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지만 미국은 인도적인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이에 분노한 테헤란의 시민들은 1979 11 4일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직원 53명을 444일 동안 인질로 붙잡아 두었다.

 

테헤란 시민들의 미국 규탄 집회

미국 대사관 앞으로 진출한 테헤란 시민들



 

이란인들은 미국이 팔레비를 이란으로 돌려보내고 미국의 은행에 있는 그의 재산을 내놓아야만 그 인질들을 석방할 것이라고 했다. 카터는 이러한 제의를 거절하고 국왕을 돌려보내지도, 그의 재산을 내놓지도 않았으며 인질들이 석방될 때까지 이란과의 무역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카터의 이런 조치는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호메이니는 카터의 위협에 결연히 맞섰고 궁지에 몰린 카터는 1980 4월 특공대를 동원, 사로잡힌 인질을 구출하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요원들을 태운 헬기가 중간에 사막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작전 결과 항공기 2대 파괴, 미국 특공대 요원 8명과 이란 시민 1명이 허무하게 죽었다.

 


사망한 대원들

 

이 사건으로 카터는 내외적으로 더욱 궁지에 몰렸고 이는 결국 그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왔다. 이런 사태의 부담을 짊어진 채 그는 1980년 선거에 나섰고 예상대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새로운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자 이란은 화해의 표시로 444일 동안 억류하고 있던 인질들을 석방했다. 사실 이란으로서도 이라크와의 싸움 때문에 미국과의 싸움을 계속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레이건의 당선 가능성이 확실해지자 알제리아가 중재자로 나선 가운데 호메이니와 레이건의 참모들의 인질석방 협상을 벌였다. 이란은 미국 내 팔레비 재산의 환수를 조건으로 인질석방에 합의했다. 1980 1 20,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에 맞춰 질병 때문에 먼저 풀려난 한 명을 제외하고 52명의 인질들이 오랜 억류생활을 마치고 조국과 가족의 품에 안겼다.

 

1981 1 21, 444일 만에 이란에 인질로 잡혀있던 미국 외교관과 민간인 52명이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