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10일

스탠리, 탐험가 리빙스턴 구해내

산풀내음 2016. 10. 13. 22:28

187111 10,

스탠리, 탐험가 리빙스턴 구해내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 3월 19 ~ 1873 5월 1)은 아프리카 선교사인 로버트 모팻의 영향으로 1840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아프리카로 떠났다. 16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1856년 이미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고, 탐험기가 7만권이나 팔려나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유명인사였다. 그 동안 그는 칼라하리 사막 횡단, 느가미 의 발견, 잠베지 발견, 빅토리아 폭포 발견 및 아프리카 횡단에 성공하였다. 1866 왕립지리학회의 의뢰를 받아 다시 아프리카로 떠난 후 소식이 끊긴 것이다.


David Livingstone

세계에서 가장 긴 폭포인 빅토리아 폭포 혹은 Mosi-Oa-Tunya(모시-오아-툰야)잠비아짐바브웨사이에 위치한 폭포이다. 빅토리아 폭포는 스코틀랜드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이것은 짐바브웨에서 사용 중인 이름이다. 더 오래된, 토착 이름인 Mosi-Oa-Tunya천둥 치는 연기라는 뜻으로 잠비아에서 공식적으로 사용 중이다. 세계 유산 목록은 두 이름 다 인정한다.

  

영국 북웨일스 벽촌에서 태어나 어릴 때 고아가 되었고 17세 때 미국으로 입양된 헨리 모던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 1월 28~1904 5월 10)1869 뉴욕 헤럴드의 사장 J.G.베네트로부터 당시 아프리카에서 소식이 끊긴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행방을 찾으라는 밀명을 받았다. 왜냐하면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 횡단에 성공한 ‘스타’ 탐험가의 실종은 당시 최고의 기삿거리였다, 야망에 불타는 젊은 기자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Henry Morton Stanley

Henry M Stanley with the officers of the Advance Column, Cairo, 1890. From the left: Dr. Thomas Heazle Parke, Robert H. Nelson, Henry M. Stanley, William G. Stairs, and Arthur J. M. Jephson

 

한편 1871 5 27일 콩고강 유역, 스탠리의 구출작전을 알 리 없는 리빙스턴은 전설적인 나일 강의 원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1865년 시작한 3차 탐험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식량은 떨어지고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외부세계와의 연락도 두절됐다. 이대로 가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1871 11 10일 탕가니카 호수 부근, 1년 넘게 리빙스턴을 찾아 헤매던 스탠리는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그는 호숫가에서 한 백인 노인을 발견했다. 비쩍 마르고 이가 모두 빠져버린 초라한 모습. 며칠 전 식량을 구하려고 이곳에 도착한 리빙스턴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검은 대륙’ 깊숙이 들어간 사람과 그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밀림 속 수천 km를 헤쳐 온 사람. 둘은 그렇게 극적으로 만났다.

 

첫마디는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Dr. Livingstone, I presume?)”였다. 그리고 리빙스턴은 극적인 조우(遭遇) 치고는 너무나 멋쩍은 인사말이었지만 그래도 이 한마디는 세계 탐험사에 길이 남는 명언이 됐다.

 


스탠리의 보급품 덕분에 목숨을 건진 리빙스턴은 함께 돌아가자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 남았다. 스탠리는 5개월 뒤 떠났고 귀국 후 ‘나는 어떻게 리빙스턴을 찾았는가’라는 책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리빙스턴은 현지에 남아 부룬디 부근에서 나일 강의 수원을 찾아냈고, 1873 5 1일 현지에서 숨졌다. 선교와 노예무역을 뿌리뽑기 위해 아프리카에 온 지 33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주민들은 그의 심장과 내장을 빼내 아프리카에 묻고 주검은 말려서 미라로 만들어 영국으로 보냈다. 미라 시신은 1874 4 1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