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12일

과달카날 해전서 일본 대패문장의 구성

산풀내음 2016. 10. 14. 22:54

1942 11 12,

과달카날 해전서 일본 대패

 

보통 과달카날 전투(Guadalcanal Campaign)라고 하면 1942 8 7일 미해병대가 과달카날 섬에 상륙한 날로부터 1943 2 9일 이 섬의 일본지상군이 모두 철수하여 이 섬에서의 조직적 저항을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의 6개월간 이 섬과 그 부근 해상에서 벌어진 미일 양국간의 무력충돌을 말한다.


이 과달카날 전투는 크게 육상전투와 해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상전투는 3차에 걸친 일본군의 공세와 이를 좌절시킨 미군의 반격으로 이루어져 있고, 해전은 이러한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서로 상대방의 병력증원과 보급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사보 섬 해전을 필두로 이 섬의 부근 해상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벌어졌으며 미국 측에서는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난 양국간의 해상무력충돌 중 7개의 중요한 전투에 '해전'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거의 무혈입성했다.

과달카날은 남태평양 솔로몬 군도에 속한 영국령 섬으로 일본군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세계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섬이었다. 1942 6월 일본군이 조선인 노무자들을 동원해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과달카날 섬은 갑작스럽게 연합국의 조명을 받게 됐다. 만약 일본군이 이 비행장을 활용하여 주변 해역을 장악하게 되면 미국과 호주를 잇는 보급선이 위협 받게 될 테고, 그렇게 된다면 호주마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1942 8 7, 과달카날섬에 상륙한 미 제1 해병사단은 일본군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다음 날 오후 비행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행장이 미군 손에 들어가자 미-일 양측은 해상을 통해 과달카날섬에 증원군을 보내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모두 7번의 각기 다른 해상전투가 벌어졌다.

8 8일 미군이 비행장을 접수했을 당시 비행장은 완공 전이었고 미군은 도망간 일본군의 장비를 이용해 8 18일 비행장을 가동 가능한 상태로 만들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뇌격기대를 이끌고 일본 기동 함대에 저공으로 육박하다가 전사한 해병 소령 로프톤 R. 핸더슨 소령의 이름을 추모해서 핸더슨 비행장이라 명명했다.

 

1942 6월 일본군에 의해 건설중인 룽가포인트의 비행장.

1942 8 7, 미해병 상륙


 

이후 핸더슨 비행장은 일본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제공권이 미군에게 넘어갔고 제해권 역시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핸더슨 비행장을 무력화 내지 탈환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지상 전투는 병력의 수적, 질적 열세로 인해 실패했고, 라바울에서 출격한 항공기에 의한 공격은 라바울과의 거리와 비행장 자체의 대공방어로 인해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0, 과달카날의 일본군 병력은 36천명으로 증원되어 있었고 정글에서는 비행장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연일 벌어지고 있었다. 이에 맞선 미군도 11 5일에는 제 8 해병연대를, 11일에는 육군 제182연대를 상륙 시켰다. 일본 대본영에서는 12월 하순을 미군에 대한 총공세 시한으로 잡고, 이 작전을 위해 3만 명의 병력과 300문의 중화기, 3만 톤의 군수물자를 과달카날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11 12, 섬을 탈환하기 위한 일본군의 총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일본이 제3차 솔로몬 해전이라 부르는 과달카날 해전의 시작이었다. 전함 2, 순양함 1, 구축함 16척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군 수송선 11척이 수마트라 섬을 떠나 과달카날로 향했고 이 수송선들에는 일본 육군 제 38사단 6천여 명의 병력과 장비가 실려 있었다. 일본 함대가 출항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 해군도 대니얼 캐러헌 소장에게 순양함 5, 구축함 8척을 이끌고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3일 새벽, 과달카날 섬과 플로리다 섬 사이의 좁은 해역에서 미국과 일본 함대간에 치열한 혼전이 벌어졌다.

 

3일간의 전투로 양측은 해전에서는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입었으나 수송선에 타고 있던 일본군 증원부대는 최악의 살육전에 그대로 노출됐다. 수송선 7척이 미군 폭격기 편대에 격침됐고, 3척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병력을 육지로 상륙시켰으나 이들 역시 미군의 총구에 여지없이 쓰러졌다. 이제 섬에 남아있는 일본군은 고립무원 상태였다. 최고 36000명에 달했던 병력 중 24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 가운데 반수 이상이 아사자였다. 태평양전쟁 개전이래 최초의 대패였다.

 


1942 11, 해전

The carrier USS Enterprise (CV-6) under aerial attack during the Battle of the Eastern Solomons.

  

과달카날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일본 육군 역시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일본군이 취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구축함이나 잠수함을 이용한 소규모 수송 밖에 없었다. 이 전투 이후에도 과달카날 일대에서 해전이 이어지긴 했지만, 일본군의 과달카날 탈환 시도에 의한 것은 전혀 없었다. 반면, 미군은 과달카날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했고, 덕분에 보급과 증원에 더 이상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를 시점으로 미군은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게 된다.

 

생포된 일본군들

U.S. troops bathe in a stream during the Battle of Guadalca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