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26일

일본, 남만주철도주식회사(약칭 만철) 설립

산풀내음 2016. 10. 19. 22:32

1906 11 26,

일본, 남만주철도주식회사(약칭 만철) 설립

 

1906 11 26일 일본 정부가 자본금 2억 엔 가운데 반을 출자한 반관반민 회사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가 도쿄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만철(滿鐵)'은 러일전쟁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1905)에 의하여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 및 부속지를 기반으로 이날 설립되어,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중국 다롄~창춘~하얼빈 간의 철도 노선을 운영했다.

 

1907년 영업을 시작한 만철은 안산제철소, 다롄 기계제작소 등 대형계열사를 설립하고 만주 구석구석에 지선을 만들며 만철을 아시아 대륙 침략의 첨병으로 발전시켰다. 철도사업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광업, 제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전개한 복합기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만주 식민화의 중핵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초기엔 다롄(大連), 이후 신징(新京)-현재의 창춘(長春)에 본사를 두었다. 1945년에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실질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세계 대공황(1929~39)의 여파가 만주에도 세차게 밀려왔다. 만철의 주요 거래품목이었던 대두의 수요가 감소하고 수송량도 급격히 줄어들어 수송운임 수입이 격감했다. 게다가 푸순탄의 판매도 부진했다. 당시 중국 본토에서 들어오는 수출 석탄의 가격에 비해 푸순탄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만철은 전성기 때 종업원이 4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는데 일본 최고의 두뇌집단인 여러 조사 연구기관의 도움이 컸다. 실제로 1907 4월에 설치된 조사부는 만철 성장의 열쇠였고 만철과 관동군을 잇는 연결고리였다. 조사부는 만주사변 발발 이듬해인 1932 '만철 경제조사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만철은 관동군의 수족이 되고 조사부는 두뇌 역할을 하며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경제조사회가 추진한 석유·석탄·철강·화학산업에 대한 관료통제 사상은 2차 세계대전 후 관료주도경제로 고도성장을 일군 일본의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철도산업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1910년부터는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해 유럽까지 가는 국제열차를 운행했고 1934년에는 다롄과 창춘의 700km를 시속 100km로 달리는 초특급열차 '아시아호(あじあ)'를 선보이기도 했다.

 

다롄과 창춘의 700km를 시속 100km로 달리던 초특급열차 '아시아호'

만주철도노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