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8일

이봉창 의사, 동경에서 왜놈 수장 히로히토에게 수류탄 투척

산풀내음 2016. 11. 20. 08:55

19321 8,

이봉창 의사, 동경에서 왜놈 수장 히로히토에게 수류탄 투척

 

1932 1 8, 일본의 히로히토 왕이 도쿄 교외의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 뒤 승용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 경시청 앞을 지나는 순간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승용차 뒤에서 터졌지만 거리가 멀어 천왕에게는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전범 히로히토는 천수를 누리고 1989 1월 7일 87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을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정확하게 56년을 더 살다가 간 것이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봉창 의사는 대역죄로 930일 도쿄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선고를 받고 10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순국 당시 미혼이었던 그의 유해는 1946 515일 국내로 봉환돼 76일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됐다.

 

1932 1 10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이봉창 의사 의거.

 

이봉창(1900 8월 10 ~ 1932 10월 10)의 아버지 이진규는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으로 당시 건축 수용의 증대에 힘입어 상당한 자산을 모은 신흥자본가였다. 그러나 그는 여자와 술, 도박을 좋아한 나머지 급기야 몰락하고 이봉창은 가난한 노동자의 길을 간다. 하지만 일본인들과 자주 어울렸으며 여자와 술, 도박을 좋아한 부친처럼 이것들을 즐기는 등 향락적인 모던보이로 살아간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1919년 이후 일을 그만두고 소일하며 있다가 일본인 지인이 조선인 식모를 구하여 데려가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조카 딸인 이은임을 식모로 주선해 함께 1925년에 일본으로 간다. 이후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당시 그는 늘 부끄러운 것은 조선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정책이 불만스럽지만 그런 일본이 원수가 아니라 일본인이 되어 대접받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할 뿐이었다그래서 이봉창은 히로히토 일본 왕의 얼굴을 봐야만 진정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1928 11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두 명과 함께 일왕의 행렬을 보려고 다니던 직장까지 접고 오사카를 떠난다. 이후 그는 잠깐씩 직장도 다니고 여행도 하면서 소일하였다.

 

그랬던 이봉창이 1931 1월 중국 상하이로 간다. 수소문 끝에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 임시정부 주소를 확인하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임정 사람들은 그를 내쳤지만 김구는 그를 만나주었다.

 

이후 폭발물 마련 등 오랜 준비 끝에 1931 12월 13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傀首,우두머리)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김구선생과 함께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했으며, 12월 17 도쿄로 출발했다.

 

1931태극기 배경으로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기념 촬영

 

1932 1월 8,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폭음 소리의 소용돌이가 멎은 뒤 이봉창은 자기 뒤에서나는 아니야, 저 사람이야라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뒤돌아봤다. 그 소리는 정복 순사 혼다 쓰네요시(本田桓義)에게 체포된 50세 가량의 남자가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주장하는 항변이었다.

 

이봉창은 혼다에게그 사람은 아니야! 나야!”라고 외치며 자신이 거사했음을 스스로 밝히고 혼다에게 체포에 응할 자세를 보였다. 그러자 혼다 외에 경시청 수사 2과장 이시모리 아사오(石森動夫), 순사부장 야마시타 슈헤이(山下宗平), 헌병 상등병 가와이 요시(河合嘉) 등이 이봉창에게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난폭했다. 이봉창은도망치거나 숨지 않을 테니 난폭하게 굴지 말라고 일갈하고 스스로 체포되어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1932 1 8일 체포된 이봉창

재판에 나가는 이봉창 의사

1932 9 30일자 아시히신문(朝日新聞)에 실린 이봉창 의사, 고문 등으로 체포 당시에 비하여 많이 수척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