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 (Bloody Sunday,1905)

산풀내음 2016. 11. 29. 20:04

19051 22,

피의 일요일 사건 (Bloody Sunday,1905)

 

1905 1 9일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 게오르기 가폰 신부의 주도 하에 청원행진이 개최되었다. 이들이 청원하고자 한 것은 노동자의 법적 보호, 당시 일본에 완전히 열세였던 러일전쟁의 중지, 헌법의 제정, 기본적 인권의 확립 등이었다. 이는 착취, 빈곤, 전쟁에 허덕이던 당시 러시아 민중의 소박한 요구를 대변한 것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 22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들의 탄원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상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손에 들고 차르의 겨울 궁전으로 평화적인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에 앞서 시작된 파업의 참가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체 노동자 18만 명 중 11만 명에 이르렀고 행진 참가자도 6만 명에 가까웠다.


"우리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억압받았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해오고 노예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린 힘이 없습니다. 황제 폐하, 우리는 삶 대신 죽음이라는 끔직한 결정을 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 당시 러시아 노동자의 탄원 중에서 -


"러시아는 크리우다가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프라우다의 실현을 요구한다"는 슬로건을 내 걸었다. 러시아 민중사상 속에서 이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프라우다(러시아말로 양심-약속-진실-정의란 긍정적인 가치의 포괄적인 정신명사)'가 정치용어로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러시아는 1894년 왕위를 계승받은 니콜라이 2세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상황은 선대보다 더 부패하고 억압적이었다. 이는 니콜라이 2세의 왕위를 계승해야 할 유일한 아들이 혈우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한 성직자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 1869-1916)에 의해 사실상 지배되고 있었다. 그는 최소한 생계조차도 힘들 정도의 무거운 세금을 부가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었다.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중심가에 진입시키지 않을 방침이었지만, 너무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진입을 막지 못했다. 시위대는 겨울궁전 근처에서 해산명령을 받았다. 군대가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시위는 해산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궁전을 향해 전진했다. 황제는 마침 부재중이었으나 당시 실권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유혈 진압 지시에 따라 근위군은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광장의 눈은 피로 물들었다. 500-600명이 죽고 수 천명이 다쳤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이날의 사태는 차르에 대한 노동자들의 신뢰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러시아 혁명의 불씨가 됐다. 사건 직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1월 파업참가자는 44 4천명으로 늘어났고 4월까지 파업 참가자는 81만 명에 이르렀다. 오를로프, 보로네즈, 쿠르츠크 등 중앙 흑토지대에서는 농민 봉기가 시작됐고 폴란드 그루지야 등 국경지역에서도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5월 러시아 각지에서 노동자와 군대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6월 말에는 전함 포템킨호에서 반란이 일어나 러시아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0월에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들이 조직한 동맹파업이 전국적으로 이어지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1905 10 17일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마침내 국민의 기본권이 담긴 헌법 제정과 자유선거에 의한 의회 창설을 약속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혁명세력은 니콜라이 2세의 선언을 놓고 10월 선언을 거부하고 계속 투쟁을 원하는 파와 10월 선언에 만족하고 생업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파로 양분되었다.

 

이와 같이 혁명세력이 분열되자 러시아 제정은 계속적인 투쟁을 원하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폴란드, 발트해 연안지역, 그루지야에는 특별 원정부대를 파견하여 독립을 위해 혁명을 지지했던 그곳 주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1906년 초 러시아 제정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군대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함으로써 1905년 혁명은 사실상 실질적인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라이오닐 코찬과 같은 사학자가 그의 저서 《1890-1918년 러시아 혁명》(Russia in Revolution 1890-1918)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을 1917 러시아 혁명으로 이끈 핵심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는 분명 새로운 혁명의 토양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