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23일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북한에 피랍

산풀내음 2016. 11. 29. 20:10

19681 23,

미국 정보함푸에블로, 북한에 피랍

 

 

1968 1 23일 동해안 공해상에서 미 해군 소속 정보 수집함푸에블로(Pueblo)’호가 북한군에 의해 나포됐다. 김신조 등 북한 무장 비정규군이 청와대를 습격(1·21 사태)한 지 이틀 뒤의 일이었다.

 


푸에블로호 미군 수병들이 나포되어 북에 끌려가는 모습과 영해를 침범하여 간첩행위를 했음을 인정한 미군들의 자필 진술서

당시 나포된 미군들

 

이날 푸에블로호는 북한 해안 40km 거리의 동해상(동경 127 °54.3 ', 북위 39 °25 ')에서 업무 수행 중 1 45분께 무장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 2대의 위협 하에 원산항으로 강제 납치됐다. 이 배에는 함장을 비롯해 6명의 해군 장교와 수병 75, 그리고 민간인 2명 등 총 83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강제 납치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했다.


납치된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 수집 보조함으로 중량 906t, 길이 54m, 너비 10m, 시속 12.2노트에 구경 50mm 기관포 2문을 갖춘 비무장 함정이었다. 미 해군 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 해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한은 당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베트남 전쟁에서 월맹을 적극 돕겠다고 공언한 터여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은 월남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지원을 억제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베트남 전선으로 가려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구축함 2척을 원산 앞바다로 보냈다. 핵폭탄을 실을 수 있는 B-52 전략폭격기와 F-105 전투기 수십 대를 미국과 일본에서 오산과 군산 공군기지로 옮겨 전진 배치했다. 또한 당시 미국 존슨 대통령은 최근 공개된 미 국방부 기밀 문서에 따르면 'FREEDOM DROP'이라는 당시 핵 사용 작전 계획까지 세웠다.

 

미국의 강경한 대응에 북한은 전군 경비령과 동원령으로 맞섰다. 당시 원산에 거주하던 탈북자 장해성과 박상운은 북한의 대공포가 원산시내와 인근 산악지역에 총집결 했었다고 증언했다. 남한 또한 이미 1.21 사태로 준 전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푸에블로호 나포 이틀 전에 일어난 1.21사태로 이미 전군 비상 총출동 명령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사건 다음날인 24일 미국 측은 11시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를 열어 1·21 김신조 사태와 함께 이 사건을 신랄히 규탄했다. 미국은 원산 해안 기점으로 12 마일을 벗어나는 공해라고 주장하며 승무원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영해침범임을 주장하며 맞섰다.

 

영해침입 여부를 판단할 열쇠는 로란. 이것은 1968년 푸에블로호가 사용했던 항해장비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기였다. 미 해군 조사위원회는 로란이 최고 5마일까지 오차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11번의 영해침입은 로란의 오차로 인한 잘못된 기록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북한의 입장은 달랐다. 북한은 로란의 기록과 항해일지를 토대로 푸에블로호가 임무 수행기간 동안 모두 17번 영해를 침입했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로 배에서 입수한 미태평양함대의 명령서를 제시했다. 거기엔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영해 3마일까지 접근해도 좋다는 미태평양함대의 허가문구가 나와 있었다.

 

이후 미국은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27일 폴란드에서 북한과의 간접 접촉을 시도한 데 이어 판문점에서 직접 비밀 협상에 돌입했다. 2 2일 세 번째 비밀 협상에서 미국이 영해 침입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조건으로 승무원 송환을 합의하였으나, 북한측은 이들의 몸값을 요구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남한정부는 철저히 배제된 채 비밀리에 28차례에 걸친 비밀 협상이 진행되었고, 사건 발생 11개월 만인 1968 12 23일 푸에블로호 선체와 장비는 북한측에 몰수되고, 82명의 생존 승무원과 시체 1구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됐다.


미국의 사과를 받아낸 북한의 승리로 사건은 종결되는 듯했으나, 미국은 승무원 송환 이후 사과를 번복하였고, 북한 억류 당시 영해 침범을 인정했던 승무원들은 북의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자백이었다고 말했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당시 판문점에서 사죄문에 서명하는 미국 대표의 침통한 표정

 

2007 5 8일 평양 대동강변에 전시된 푸에블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