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25일

미국, 대륙횡단 전화회선 개통

산풀내음 2016. 11. 29. 20:19

19151 25,

미국, 대륙횡단 전화회선 개통

 

1914 6 14일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대륙 횡단 전화선의 마지막 전봇대가 네바다 주와 유타 주 경계선에 설치되었고, 1915 125, 미국에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간 4,700km를 잇는 대륙횡단 전화가 처음 개통돼 통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북아메리카대륙 철도건설과 맞물려 이어졌다.

 

첫 통화자는 전화를 처음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뉴욕)과 영원한 조수 토마스 왓슨. 둘은 감회에 젖어 23분간을 통화했다이미 뉴욕과 보스턴(1877), 뉴욕과 시카고(1892) 간에 전화가 연결됐으나 이때는 방음실에 들어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리전달이 약했다. 이 때문에 대륙횡단 전화선에는 증폭기를 사용, 음질을 향상시킨 것이 벨의 대륙횡단전화였다. 1927 17일에는 뉴욕과 런던을 잇는 상업무선전화가 개통됨으로써 바야흐로 세계가 하나되는 신시대가 열렸다.


이 날의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 기사의 한 구절은 이러했다. “그들은 38년 전 통화 때보다 훨씬 더 분명한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1876년 벨과 전화기

1892년 뉴욕에서 시카고로 시범 통화 중인 벨

 

1876 2 14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과 엘리샤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는 두 시간 차이로 전화 발명 특허를 신청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특허 사무국은 먼저 신청한 벨에게 전화 발명 특허를 주었다. 당연히 그레이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벨이 마침내 1876 3 10일 세계최초로 전화실험에 성공했다. 전화선을 타고 처음 흐른 말은 "웟슨군, 이리로 와주게. 자네가 필요하네`라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전화통화의 마지막 실험을 위해 실험장치 앞에 앉았던 벨이 전원으로 사용하던 배터리용 황산그릇을 잘못 건드려 황산이 그의 옷에 쏟아지는 바람에 그는 엉겁결에 실험하려던 통화의 내용을 잊고 첫마디를 이렇게 다급하게 외쳤던 것이다. 웟슨군은 그의 실험조수로 이날 실험통화를 위해 2층 실험실에 대기 중에 있던 상태였다.

 

벨은 이후 수 백 건의 특허 소송에 휘말렸지만, 소송 와중에도 1888년 땅속에 전화선을 설치했고 1889년에는 최초의 동전 전화기도 설치했다. 1893년 벨의 전화기 특허권이 만료되어 다른 업체들도 전화기를 팔기 시작했지만, 선도 주자로서의 벨 전화회사의 입지는 탄탄했다.

 

1915년 대륙횡단 전화회선을 개통했고 그로부터 7년 뒤 1922 8 2일에 75세의 벨은 당뇨병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벨이 숨을 거두기 직전 아내는 벨에게 “나를 떠나지 마세요”라 속삭였고, 기력이 다한 벨은 말 대신 수화(手話)로 ‘떠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했으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틀 뒤 8 4일 오후 6 25, 당시 가동 중이던 미국과 캐나다의 모든 전화가 1분 동안 불통되었다. 벨을 추모하는 뜻에서 미국과 캐나다 전역의 전화 시스템 가동을 중단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전화발명가라는 벨의 타이틀은 126년 만에 박탈당했다.

전까지는 벨이 전화 발명자로 알려졌으나, 이탈리아의 발명가 안토니오 무치(Antonio Meucci, 1808~1889)가 최초의 전화 발명가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무치는 자석식 전화기를 발명한 뒤 특허를 내기 위해 웨스턴유니언전신회사(Western Union Telegraph Company)와 의논하는 동안 설계도와 전화기 모델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후 벨이 무치가 발명한 것과 비슷한 전화기로 특허를 취득했다는 것이다. 당시 무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하지만 역사는 결국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2002 6월 미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안토니오 무치를 최초의 전화 발명자로 인정했다.

 

세계 최초로 전화기를 발명한 안토니오 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