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31일

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전투 항복

산풀내음 2016. 12. 4. 10:06

19431 31,

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전투 항복

 

1943 1 3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 )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세계대전 중 19428 21일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독일군이 돌입한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를 소련군이 포위, 탈환한 싸움으로 대전의 결정적 전환점의 하나가 되었다. 볼가강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공업도시 스탈린그라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을 뿐 만 아니라 그 이름이 지닌 상징성 때문에 독일과 소련 양국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베를린에서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2,715km 떨어져 있어서 차로 무려 30시간 이상 쉬지 않고 달려야 도착하는 거리이다. 마찬가지로 기갑부대의 이동 속도를 고려하면 당시의 운송 수단으로 이렇게 먼 거리의 보급선을 늘어놓고 전쟁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1941 6 22일 독일군과 추축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략했다. 1941년 여름과 가을에 극심한 타격을 입은 소련군은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을 기점으로 반격에 나섰다. 탈진하고 겨울 장비가 부족한 데다가 보급로가 약해진 독일군은 모스크바에 대한 진격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의 선봉 부대였던 제 14기갑군단이 볼가강에 도달할 때쯤 독일군의 공격 기세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폐허가 된 시가지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는 소련군 2개 야전군이 온전히 전력을 보존한 채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2 821일부터 이듬해 1월말까지 6개월 동안 파울루스 장군 휘하의 독일군 50만 명과 추이코프 장군의 소련군 170만 명 등 2백 만 명이 넘는 군대가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벌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양국의 사활을 건 대전투였다.

 

A German unit at Stalingrad

독일군의 잔인한 공습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스탈린그라드에 아이들

볼가강이 보이는 스탈린그라드 상공에서 공습을 하고 있는 루프트바페 스투카 편대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은 폐허가 된 스탈린그라드

러시아 Tank

August 1942. Russians fire at Luftwaffe bombers who flattened Stalingrad. The bombing was led by the ace Richthofen. But the bombing finally worked against the Germans as the ruins of the city enabled the Russians to resort to urban hand-to-hand combat

Russians fire from the roof of a building

볼가강 스탈린그라드 쪽의 강변 지역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강 건너편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로켓 발사기

 

전세가 기울어지자 한때 무적을 자랑하던 독일 6군단의 파울루스 장군은 제6군을 남서쪽으로 후퇴시키기를 요청했으나 히틀러는 거절했고 대신 모든 원조를 약속했다. 하지만 군수 물자는 커녕 식량의 지원이 끊겨 12월부터 독일 6군단의 병력은 루마니아 기병대가 남기고 간 말들을 잡아먹으며 버티고 있었다.

 

끝내 파울루스는 거듭 항복허가요청을 했지만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허가 요청을 거부하고, 그를 원수로 승진시켜 격려했다. 하지만 견디다 못한 파울루스는 이날 항복하여 24명의 장군과 2500명의 장교를 포함한 9 1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소련군은 사기가 올라 전면적 반격을 개시, 전세가 바뀌고 독일군은 충격을 받고 수세에 몰렸다.

 

보급은 턱없이 부족하고 굶주리게 된 독일군들은 주위에 말들을 잡아서 먹기 시작. 사진은 독일군들이 먹어 치운 말들에서 잘라낸 말굽들이 쌓여있는 모습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항복한 후에 약 11만 명의 포로들은 소련군에 의해 포로 수용서까지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함. 이런 행렬은 이미 심각한 건강 악화 상태의 대부분의 포로들에게는 사형 집행이나 마찬가지. 실제 11만 명 중에 항복 후 단 3개월 만에 75,000명이 사망했고 실제 전쟁이 끝난 후에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생존자는 고작 6천명.

Starving men of a once proud Sixth Army shuffle along in Stalingrad after the surrender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파울루스 사령관, 그는 포로가 되었지만 선전도구로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소련이 1944년 독일에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자 소련군의 선전기관의 우두머리가 되어 선전 도구로 사용됨. 1953년 독일로 돌아오지만 운동신경 마비 증세로 1957년 비참한 몰골로 인생을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