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23일

한일의정서 강제 조인

산풀내음 2016. 12. 23. 19:45

19042 23,

한일의정서 강제 조인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 후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일본과 얼지 않는 항구를 얻기 위한 남하정책의 일원으로써 조선 진출을 희망하던 러시아만주와 조선에서의 세력 다툼으로 1904년 초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1 23일 엄정 중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2 9일 지상군 선발대 2천 명을 인천을 통해 서울에 진주시켰다. 중립선언은 무의미해졌다.

 

일본 해군은 1904 2 8일 중국 여순항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 함대에 기습공격을 개시함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제물포에서 다음 날인 2 9일 러시아 함정을 공격하였다. 선전 포고는 2 10일에 이루어졌다. 러일전쟁에서 어느 정도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본색을 드러냈다.

 

결국 이미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시킨 일본의 강요에 의해 한국 식민지화의 첫 단계인 한일의정서가 1904 2 23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1870-1928)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1860-1939) 사이에 체결됐다.

 

일본은 사전에 친일파인 이지용에게 1만엔을 주어 매수하였고, 친러파로 의정서 체결에 반대해 온 탁지부 대신 겸 내장원경 이용익을 납치해 일본으로 압송하고, 보부상의 핵심인 길영수, 육군참장 이학균, 육군참령 현상건 등을 연금한 뒤 이날 체결을 강행했다.

 


돈에 매수되어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중에 한명이기도 한 이지용()과 하야시 곤스케()

 

의정서 내용은 1. 한국정부는 일본을 신임하여 `시설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 2.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도모할 것 3.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할 것 4. 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신속히 대처하며 5. 한국정부는 이와 같은 일본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정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6. 한국과 일본은 상호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일의정서는 대한제국이 본격적으로 국권상실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했다. 3 8일자 관보를 통해 의정서 내용이 알려져 여기에 서명한 이지용과 참서관 구완희의 집이 폭탄세례를 받는 등 민중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일제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3 17일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에 파견해 의정서 실천을 조선 정부에 강요했고, 무력시위로 민중저항을 진정시켰다. 거기에 한국 정부는 이지용을 보빙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한·일 친선의 분위기 조성에 보조를 맞추었다나아가 대한제국은 5 18일자 조칙으로 한-러 간 체결되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 양도하였던 이권도 모두 폐기한다고 선언하였다.

 

일본은 이 의정서를 근거로 한국에서의 군사 활동을 자유롭게 하고 여러 이권을 점유하였다. 한국의 통신기관을 군용으로 접수하고, 경부와 경의선 철도부설권도 일본군용으로 넘겨 받았다. 또한 6 4일에는-일 양국인민 어로 구역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서해안 어업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의정서에 따라 일본이 일본군 주둔 목적으로 헐값에 땅 300만 평을 강제 매수하였는데 이 땅이 오늘날의 용산 미국기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