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2월 28일,
황성신문 복간
한일합방전까지 민족의식의 고취와 문명개화의 선구자로서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지 황성신문(皇城新聞)은 1898년 9월 5일 남궁억, 나수연 등이 주축이 되어 창간됐다. 국한문혼용이라고 해도 거의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단 정도의 한문위주의 문장으로 제작되어 독립신문이후 순한글로 제작되던 전통을 깨뜨려 한학자층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04년 2월 24일 한일의정서의 조인내용을 게재했다가 외부의 게재금지명령으로 기사를 삭제당해 문제된 기사의 활자를 뒤집어 인쇄한 이른바 `벽돌신문` 발간한 일과 1905년 11월 20일자 `시일야방성대곡` 기사로 정간을 당하고, 사장 장지연을 비롯한 10여명의 직원이 체포된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후 1906년 2월 28일 복간되었으나 심한 경영난을 겪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으로 바뀌어 8월 30일자부터 9월 14일까지 발행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