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4일

난징(南京)사건 발발

산풀내음 2017. 1. 24. 20:39

1927 3 24,

난징(南京)사건 발발

 

1927 3 24일 오전 5시반. 청천백일기(현 대만 국기명)를 든 중국 국민당의 당군인 국민혁명군은 북양군벌을 격파하고 난징(南京)에 입성했다. 전투가 끝난 시내에는 정적만이 감쌀 뿐이었다.

 

국민혁명군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전 7시경 약 30명의 혁명군이 일본 영사관에 와서 적병이 없는지를 묻고 돌아갔다. 그리고 30분이 지난 후 약 200명의 중국인 병사들이 일본영사관을 습격했다. 일본 육군무관, 경찰서장들이 중상을 입고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중국인 병사들은 한 손에는 총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지갑, 시계, 반지를 뺏어 들었다. 그 뿐 만이 아니었다. 침구, 가구, 조리기구 등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빼앗아 트럭과 마차에 실었다. 이때 병사들은 "일본 제국주의 타파, 중국과 소련은 한 가족, 일본인의 재산은 중국인에게서 뺏은 것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여기에 수백 명의 민간인이 약탈에 가담해 마루 판자, 변기, 빈 병까지 모조리 약탈되었다.

 

한편 오전 9시경에는 영국 영사관이 역시 제복을 입은 국민혁명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들은 마침 밖으로 나온 영국 총영사에게 부상을 입히고 난입해 관원을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미국 영사관 역시 약탈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간대에 동시다발적으로 교회, 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 상점들도 약탈되었다.

 

이윽고 오후 4시경이 되자, 양쯔강에 정박 중이던 미국과 영국 함대로부터 성내로 불과 1시간 만에 200발이 넘는 포탄이 쏟아졌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외국인을 모욕하고 살상하였다는 이유와 거류민을 수호한다는 구실로 군함을 동원,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2000명이 넘는 중국인을 살상했다.

 

이후 외국열강들이 이날의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자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건 발생 원인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날의 외국인에 대한 모욕과 살상은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여러 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공산당의 음모였음이 밝혀졌다고 주장, 공산당을 공격했다. 그 후 장제스는 외국과 관계를 맺고, 4 12일 상하이, 난징 등에서 공산당을 탄압하는 쿠데타(412쿠데타)를 일으켜 대외 협조방침을 취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37년에는 이곳 난징에서 일본에 의해 대학살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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