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7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

산풀내음 2017. 2. 18. 08:04

18964 7,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

 

매년 4 7일은신문의 날이다. 우리나라 최초 민간신문독립신문의 창간일인 1896 4 7일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처음 제정돼 지금까지 기념해오고 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발족되고한국신문윤리강령이 선포된 날도 1957년의 이날이므로 우리나라 언론인들에게는 뜻 깊은 날이 아닐 수 없다.

 

19세기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미국, 러시아, 청나라, 일본 등 여러 강대국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문호 개방을 전후해 개화파 세력이 형성되었고,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를 필두로 한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거사가 실패하자 당시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서재필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한편 온건 개화파 일부는 정변 이후에도 조선에 남아 소극적인 수준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자 온건 개화파는 이들과 함께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갑오개혁으로 권력을 잡은 개화파 유길준은 해외로 망명 떠나 있던 개화파 동지들을 다시 조선으로 불러들였는데, 그 중에는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던 서재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독립신문 발간이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였다. 서재필이 발의하고 온건개화파가 나서 신문발간을 서두르자 정부도 창간자금 4400원과 사옥, 심지어 생계비까지 지원하며 독려했다. 창간 후에도 지방관청과 각급 학교에 구독을 권장하며 부수확장을 도왔다. 서재필은 이미 일본과 미국에서 신문의 위력을 경험한 상태였으며, 백성을 계몽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수의 지식인이 일방적으로 이끌고 나아갔다가 실패했던 갑오개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열강들 사이에 있는 조선이 국가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계몽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과 서재필, 유길준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국민 계몽에 대한 의지 덕에 독립신문은 백성을 위한 신문으로 태어난 것이다.

 


서재필 선생()과 독립신문 발행 모습()

 

독립신문은 최초로 한글로만 쓰여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갑오개혁 이전까지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문이었다. 공식적인 서류들은 모두 한문으로 작성되었으며 한글은 보편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갑오개혁 때에서야 한글이 나랏글이 되면서 공식적인 문서도 한글로 작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한글을 이용해 정보가 활발히 교류되지는 않고 있었다. 독립신문 이전에도 한성순보라는 신문이 존재했지만 한성순보는 한문으로 쓰여져 백성들이 읽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독립신문은 최초로 순 한글로 쓰여진 신문일 뿐 아니라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행한 신문이다. 최초로 독립신문에 띄어쓰기를 적용한 사람이 서재필인지 그와 함께 독립신문사에서 일하던 주시경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서재필이 미국에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띄어쓰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에 독립신문에 띄어쓰기를 적용한 사람 역시 서재필로 추정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독립신문에서는 최초로 언문일치도 실시했다. 한문을 사용할 때에는 어순 등이 구어체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독립신문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평상시 말하는 그대로 한글을 이용해 글을 썼다.

 

독립신문은 백성들을 개화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 정치적 상황을 낱낱이 밝혔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국가가 부강해질 수 있는 새로운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을 확산시키고 외국 풍습에 대해 알려주는 기능도 했다. 아울러 무능한 정부나 부정 부패한 관리를 비판했으며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주권의식을 깨우쳐주었다. 한성순보와 달리, 독립신문은 확실히 언론의 비판 기능을 수행하려 한 것이다.

 

독립신문은 많은 백성이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근대적 공론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시민들이 독립신문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독립신문이 배달되면 한 명이 시장에 나와 큰 소리로 신문을 읽고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그 이야기를 들었으며, 서로 신문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나와 있다. 이는 민중과 민중, 민중과 관원 사이에 소통의 장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독립신문은 일반 백성들이 직접 참여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었다. 독립신문이 간행된 기간은 약 3년으로 그리 길지 않으나, 그 동안 독자들이 실명 혹은 익명으로 독립신문에 투고해 실린 글은 400건이 넘는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 크기로 4면 발행이었다. 13면은 순한글판, 4면은 영문판(The Independent)이었다. 초대 사장 겸 주필은 서재필이 맡았고 직원은 고원(告員) 또는 탐보원(探報員)으로 불린 기자 23명을 포함, 10명 안팎이었다. 신문값은 동전 1, 즉 동전 한 닢으로 출발했다. 서재필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의 기관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독립신문이 독립협회보다 먼저 창간되었다

300부로 시작한 발행부수도 한때 3000부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지만 재정자립을 이루지 못한 신문사에 파국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정부의 부패와 러시아의 이권침탈 비판에 앞장서자 정부가 사옥을 회수하고 친러 수구파가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899 12 4, 3 8개월 만에 종간됐다.

 

 

독립신문 창간사

 

우리 신문이 한문은 쓰지 않고 한글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하려는 것이다. 또 한글을 이렇게 구절을 떼어 쓴 것은 누구든지 이 신문을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려는 것이다.

 

각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남녀를 막론하고 자기 나라 글을 먼저 배워 능통해진 후에야 외국 글을 배우는 법인데, 조선에서는 조선의 글을 배우지 않더라도 한문은 공부하는 까닭에 한글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다.

 

한글과 한문을 비교하여 보면 조선의 글을 한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하니, 첫째는 배우기가 쉬워서 좋은 글이요, 둘째는 이 글이 조선 글이니 조선 사람들이 익혀 모든 일을 한문 대신 한글로 써야 상하귀천이 모두 보고 알아보기가 쉬울 터이다. 한문만 늘 써 버릇하고 한글은 버려 둔 까닭에 한글로만 쓴 글을 조선 사람이 오히려 잘 알아보지 못하고 한문을 잘 알아보니 그게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또 한글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건 다름이 아니라 첫째는 어절을 뛰어 쓰지 않고 그저 줄줄이 내려 쓰는 까닭에 글자가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몰라서 몇 번 읽어 본 후에야 글자가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알고 읽으니 한글로 쓴 편지는 한 장을 보려면 한문으로 쓴 것보다 느리게 보고도 그나마 한글을 자주 쓰지 않으므로 서툴러서 잘 못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에서 내리는 명령과 국가 문서, 서적을 한문으로만 쓰면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남의 말만 듣고 무슨 명령인줄 알고 자기가 직접 그 글을 못 보니 그 사람은 바보가 된다.

 

한문을 못한다고 그 사람이 무식한 사람이 아니다. 한글을 잘하고 다른 물정과 학문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한문만 하고 다른 물정과 학문이 없는 사람보다 유식하고 높은 사람이 되는 법이다. 조선의 부인들도 한글을 잘하고 여러 물정과 학문을 배워 소견이 높고 행실이 정직하면,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그 부인이 한문은 잘하고도 다른 것을 모르는 귀족 남자보다 높은 사람이 되는 법이다.

 

우리 신문은 빈부귀천의 구별 없이 이 신문을 보고 외국물정과 국내 사정을 알게 하려는 뜻이니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우리 신문을 며칠에 나올 때마다 몇 달간 보면 새 지식과 새 학문이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