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6일

세월호 침몰과 함께 대한민국의 양심도 침몰한 날…

산풀내음 2017. 3. 3. 22:29

20144 16,

세월호 침몰과 함께 대한민국의 양심도 침몰한 날

 

 

 

 

2014 4 15, 안개 때문에 출발이 2시간 30분 지연된 세월호는 오후 9시에 476(잠정)의 인원과 짐을 싣고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세월호에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 교사 14, 일반인 104, 선원 33명이 탑승하였다. 또한 차량 180, 화물 1157톤이 실렸음이 사고 후에 밝혀졌는데, 이로부터 인천항을 출발할 당시의 차량과 화물, 승객의 체중을 모두 더하면 적재 한도를 초과하는 것으로 계산되기도 한다.

 

선박자동식별장치의 항적 자료와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세월호는 오전 8 30분경 맹골도와 서거차도 사이를 최고 속도로 진입하였고, 항로를 바꾼 후 지그재그로 운행하다가 8 49분경에 병풍도 부근에서 다시 급격히 항로를 바꾸어 급선회했다. 항로는 'J'자를 그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오전 8 52 32 (KST),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최초로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최초 신고자인 학생이 던진 첫마디는 "살려주세요"였고, 이후 그는 배가 침몰하고 있음을 알렸다. 세월호는 최초 신고보다 3분 후, 사고 해역과 가까운 진도관제센터(VTS)가 아닌 제주관제센터(VTS)에 교신해 배가 침몰 중임을 알렸다(8 55). 그리고 다시 이 제주관제센터(VTS)는 목포해경이 아닌 제주해경에 연락했고(8 56), 8 58분에 비로소 목포해경이 사고를 접수했다. 이에 추후 상황을 파악한 진도관제센터(VTS) 9 6분에 세월호와 교신하여, 세월호를 호출하여 직접관제를 시작하였다. 9 17분의 진도관제센터와의 교신에서 세월호 선원은 배가 50도 이상 기울어져 있다고 보고하였다.

 

사고 접수 후, 해양경찰 및 민간어선들이 출동 및 구조에 나섰다. 사고 당일 구조된 세월호 탑승자는 승무원 23, 단원고생 75, 교사 3, 일반인 71명으로 모두 172명이었다. 수색 및 인양 작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색 작업 종료를 발표한 11 11일까지 총 209일간 계속되었다. 바다 밑 수색은 거센 조류와 탁한 시야, 낮은 수온으로 작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작업 일정이 길어지면서 피로의 누적과 그에 따른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수학여행에 나선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생 325명 등 476명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 침몰 사고로 단원고 학생 246명을 포함해 모두 30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세월호와 함께 기성 세대의 양심도 침몰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꿈도 .

 

 

 

 

 

 

 

 

 

 

 

 

그런데 우리는 벌써 잊은 듯 하다.

 

단원고 학생들… 이 중 단 2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1) 청해진 해운

 

1999 3 10일에 설립되었고, 실소유주는 유병언 회장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병언 회장은 구원파 목사로서,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과의 친분을 배경으로 한강 유람선 사업권을 따내면서 해운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그가 회장으로 있던 세모그룹은 5공 정권의 비호 아래 준재벌급으로 성장하게 된다. 1990 세모가 운행하던 한강 유람선이 다른 선박과 충돌, 침몰하여 15명이 실종된 바 있는데, 당시 세모는 실종자 수를 축소, 조작해 발표하는 바람에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인천-제주, 인천-백령도, 여수-거문도 등의 정기 연안여객선 사업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며, 인천-제주 간 노선은 독점 운항하여 왔었다. 2010 2월에는 2대 주주로 있던 한강 수상택시 운영을 주목적으로 하는 수상 여객 운송기업 주식회사 즐거운서울을 흡수 합병하여 서울특별시 한강 수상택시 사업에 진출하였었다.

 

2014 4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을 물어, 동년 5 12일자로 해양수산부로부터 인천~제주 항로의 연안여객선 운송 면허를 취소당하였으며, 현재는 영업을 중단한 상태다.

 

세모그룹은 속칭 구원파로 불리는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교주 유병언이 설립한 회사로 신자들은 회사 설립 과정에서 자금과 노동력을 댔다. 유씨와 장인 권신찬 목사는 1962년 기존 교단에서 사이비 종교로 규정한 기독교복음침례회를 만들었다.

 

이는 WEC 소속 네덜란드인 선교사 케이스 글래스(Kays Glass, 길기수)와 믿음의 방패선교회(Shield of Faith Mission) 소속 미국인 선교사 (Dick York, 덕인영)1960년대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들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권신찬, 유병언, 박옥수에 의해 시작되었다.

 

구원파라고 불리는 이유는 다른 기성교회 교인들과 논쟁을 벌일 때 단골 질문으로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구원받았는지 아십니까?", " 사함 받으셨습니까?", "거듭나셨습니까?" 등의 말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 유병언()과 부인 권윤자(), 중간 자식들, 유대균(), 유병화(중간), 유섬나(), 유상나는 미확인, 아래는 구원파 신도들.

 

호위무사(?) 박수경과 함께 체포되는 유대균.

 

 

2) 세월호

 

세월호1994 6,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선거(林兼船渠)에서 건조한 페리선이며, 건조 후 일본 마루에이 훼리(マルエーフェリー)사에서 18년 넘게 Ferry Naminoue(フェリー波之上 페리 나미노우에 또는 나미노우에마루)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오키나와 나하간 운항하다가 2012 10 1일을 마지막으로 퇴역되어 중고 선박 시장에 매물로 나온 것을 청해진해운이 2012 10월에 매입하여 개수작업을 거친 후 세월호(歲月號)라는 이름으로 2013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하고 있었다.

 

명칭인 세월호는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의미의 歲月(해 세 + 달 월)이다. 이름은 유병언 회장이 직접 지었고.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작명을 사유로 한번 출항시 수천만원의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3) 선사, 선원, 당국이 합작한 참사

 

세월호 침몰의 기술적 원인은 선사의 무리한 증축으로 인한 복원력 약화, 과적(過積)과 부실 고박(固縛), 선원들의 운항(조타) 과실 등이 결합한 사고였던 것이다.

 

우선 배 자체에 결함이 내재해 있었다. 유병언(사망)이가 실소유주였던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2012년 일본에서 수입해 유 전 회장 개인 전시실과 객실 등을 증축한 사실을 확인됐다. 이로 인해 배의 무게중심이 51㎝ 올라갔다. 이런 상황에서 배의 균형을 잡는 복원성을 유지하려면 적재 화물을 1448t 감소시키고 평형수(平衡水) 1324t 증가시켜야 했다. 또 무게가 40t가량인 선수 오른쪽 차량 진입문을 철거해 우현에 부족한 무게를 보충하거나 좌현의 무게를 줄여야 했다. 하지만 청해진해운 경영진은 이런 보완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화물을 최대한 많이 싣기 위해서였다. 세월호의 기준 평형수는 1694.8t이지만 실제 실은 평형수는 761.2t에 불과했다.

 

 

 

 

 

 

화물 적재량을 관리·감독해야 할 선장 이준석(70) 등 사건 관련자에 대한 광주지법의 1심 재판에서 선장과 일등항해사, 청해진해운 물류팀 담당자들은 모두 "세월호에 적재 가능한 최대 화물량이 얼마인지 (사고 전까지) 몰랐으며, 화물 중량을 재는 장비도 없다"고 진술했다.

 

선원 등 선사 직원들의 직무를 관리·감독해야 할 선사 경영진과 감독 당국도 이들의 안일과 탈법을 묵인하거나 조장했다. 평균 운송수입률(기존 선박의 평균 수입÷기존·신규 선박의 최대 가능 수입)이 낮으면 안전 조치에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에 수입률이 25% 이상으로 유지될 때에만 인가가 나게 돼 있지만, 청해진해운의 2011년 평균 운송수입률은 24.3%였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결국 청해진해운은 수입률을 높이려고 여객 정원을 804명에서 750명으로 줄인 허위 계약서를 인천항만청에 제출해 인천-제주 노선의 인가(認可)를 받았다. 한국선급은 선박 중량이 100t이나 적게 산정돼 복원성이 잘못 계산됐는데도 관련 시험 보고서를 승인했다.

 

이처럼 세월호는 침몰의 운명을 안은 채 2014 4 15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인천항을 떠났다. 출항 전 평형수를 933.6t 줄이고 대신 1065t의 화물을 더 실었다. 2단으로 쌓아올린 컨테이너는 밧줄로 둘러 묶는 방법으로 고박했다. 원칙대로라면 바닥에 돌기를 설치해 컨테이너를 꼼꼼히 고정해야 하지만 물류 담당 직원들은 대충 작업을 진행했고 선장 이준석씨와 선원들도 이를 묵인하고 넘어갔다.

 

출항 이튿날인 4 16일 오전 8 48. 선장 대신 당직 근무를 하던 삼등항해사 박한결(여·27)씨는 조타수 조모(57)씨에게 우현으로 변침(變針)하라고 지시했다. 박씨는 당시 경력이 5개월 정도에 불과했고 맹골수도 해역을 처음 운항하고 있었다. 조타수 조씨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변침이 이뤄지지 않자 조타기를 큰 각도로 돌렸다. 이때부터 잠재돼 있던 참사 요인들이 잠에서 깨어나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복원성이 약한 세월호는 좌현 쪽으로 급히 기울었고, 제대로 고박돼 있지 않던 화물이 좌현 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화물 때문에 배는 더욱더 기울었다.

 

 

 

 

연안 바다의 파수꾼을 자처한 해경 역시 무능을 드러냈다. 9 35분쯤 현장에 도착한 해경 '123'은 가장 먼저 기관부 선원들을 구조하고 다음으로 조타실 선원들을 구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구한 일반 승객도 스스로 배 밖으로 나오거나 바다에 뛰어든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해경이 선내에 대기 중이던 승객들에게 퇴선 방송을 하거나 선내로 들어가 구조활동을 벌이진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늑장 대응'도 구조 실패를 가져왔다. 침몰 당시 구조를 벌일 수 있는 장비와 실력을 갖춘 구조요원들은 모두 멀리 떨어져 있어 배가 완전히 침몰한 뒤 현장에 도착했다. 소방방재청(당시)은 최고 실력을 갖춘 잠수사들을 현장에 보냈지만, 경기 남양주에서 출발한 터라 진도 앞바다엔 오전 11 45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목포 해경 122구조대는 목포 본부에서 100m 떨어진 해경 전용부두에 정박 중이었던 상황 대기함 513함 대신 팽목항까지 버스로 이동하다 시간을 허비했고 서해해경청 특공대도 출동 명령을 받고 무작정 목포항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배편이 없어 오전 11 28분에야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배가 침몰한 곳이 민물이면 소방이, 짠물이면 해경이 담당한다'는 업무 구분 탓에 사고 현장은 해경이 지휘했다. 하지만 정부 부처별·기관별로 13개 사고대책본부가 난립했고, 해경이 중심을 잡아줬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해경과 해군의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해경과 해군 간에 상황이 공유돼야 했지만, 이를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더 나아가 청해진해운 중간관리자 출신인 ㄱ씨는 지난 1월 청와대 민원실 누리집을 찾아 이 업체 소속 여객선의 안전사고 위험성과 임금 체불 등에 관한 고발 민원을 접수했지만, 임금 부분을 뺀 나머지 문제 제기와 관련해서는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ㄱ씨는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한겨레>와 세 차례 만나청해진해운의 문제를 몇 장에 걸쳐 고발하는 과정에서 잦은 사고에도 아랑곳 않고 운항하는 오하마나호와 관련한 뒷배 의혹, 안정적이지 않은 직원 고용의 문제 등을 소개한 뒤이런 청해진해운을 정밀 조사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으나 청와대는 무시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사고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은 △2006년 오하마나호의 연속적 사고 무마와 배후에 대한 의혹성수기 정원 초과 운항 및 해당 운임 횡령 의혹불법적 비정규직 직원 채용 기간 연장일부 청해진해운 관계자의 화물 운임 유용 의혹선내 매출금의 비자금 전용 의혹 등이다.

 

(한겨레, 2014. 4. 29.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4965.html)

 

 

 세월호와 박근혜 대통령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42753.html

 

 

 

4)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의 무책임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검찰 수사와 법원의 1심 재판을 통해 선장과 선원들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 때문에 피해자 수가 늘었다는 점이 확인됐다. 배가 기운 직후 조타실에 모여든 항해부 선원 8명은 탈출 때까지 40여분간 대피, 퇴선 유도 등 승객 구호를 위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허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사고 발생 직후 '선내에 대기하라'는 승무원들의 지시 방송은 결정적으로 승객의 탈출을 막았다.

 

기관부 선원 7명은 사고 직후 3층 기관부 선실 앞 복도에 모여 30분 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9 46분쯤 맨 먼저 해경 구명정에 올라탔다. 이들이 배를 탈출하는 순간에도 정확한 외부 상황을 모르던 객실 승무원들은 승객들에게 대기하라는 방송만 계속하고 있었다. 탈출할 수 있었던 승객들을 배 안에 묶어놓은 채 자기들만 살자고 나온 셈이다.

 

순직한 서비스직 승무원 박지영씨가 무전으로 계속 퇴선명령 여부를 조타실에 문의했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무전기는 무전기를 가진 전원에서 송수신 내용이 다 들리기 때문에 못 들었다거나 고장났다거나 하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즉 자신들의 목숨 이외의 선박직 이외의 다른 승무원을 포함한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되는데 걸리적대는 장애물로밖에 보지 않았던 정황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이들 선박직 선원들은 해경 123정의 보트에 의해 기관직 승무원들 다음 두 번째로 구조되지만, 자신들의 안전이 확실히 확보된 이후에도 승객 퇴선 명령은 내리지 않았고 해경에 그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승무원 중 1등 항해사 강 아무개는 구조된 이후에 자기 소지품인 휴대폰을 챙기려 배에 다시 올라 자기 휴대폰은 챙겨 오면서도 퇴선명령(선실 옆 객실에 탈출하라고 소리치지도 휴대폰으로 전화하지도)은 끝내 내리지 않았다.

 

 

 

 

이준석

 

 

 

5) 관련자 구속

 

검찰, 해양경찰에 의해 진행된 수사로 선장 이준석과 항해사, 조타수, 기관사 등 배의 운항과 관련된 선박직 직원 15명은 전원 구속 수감되었다. ()청해진 해운의 물류부장 김모와, 물류팀장 김모, 청해진해운 해무 담당 이사인 안모, 그리고 김한식 대표이사도 구속되었다.

 

세월호의 구명정 정비업체인 '한국해양안전설비'의 대표도 구속되었다. 구명정이 펴지지 않는 불량 상태였는데도, 양호하다고 허위로 기재한 검사 결과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유병언의 측근인, ()아해 전 대표 이강세, 오경석(53) 헤마토센트릭라이프연구소 대표, 김동환 ()다판다 감사(48)도 구속되었다. 유병언의 장남인 유대균(44)는 검거시 일계급 특진 조건을 걸고 A급 지명 수배가 되었다. 그의 자택에 체포 영장을 들고 강제 진입했지만 유대균은 없었다. 그러나 7 25, 경기도 용인에서 검거되었다. 유병언의 장녀 유섬나가 5월 말, 프랑스에서 인터폴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시 인터폴은 이미 고인이었던 유병언을 수배중이었다.

 

 

 

 

 

 

6) 잊어선 안 될 세월호 의인들

 

① 안산 단원고 학생, 정차웅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정차웅(17) 군은 세월호 참사 당시 친구들을 구하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그는 구출 행렬에 있었음에도 불구,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주고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남도 201호 어업지도선은 16일 오전 1025분께 침몰된 세월호의 좌현으로부터 20m 떨어진 해상에서 떠내려가는 정군을 구조했다. 당시 정 군은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정차웅 군의 마지막 모습은 해양경찰청이 28일 공개한 9 45초짜리 최초 구조상황 영상에 담겨있다. 해경은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로 정군을 필사적으로 살리려 했으나 정군은 끝내 의식을 찾지 못했다.

 

 

정군은 검도 3단 유단자로 의협심이 강했고 대학 체육학과에 진학하는 꿈을 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군이 생일을 불과 하루 앞두고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정군에게 뒤늦게 짝사랑 고백한 한 여학생의 사연이 알려져 더더욱 안타깝게 했다.

"1년 전부터 널 몰래 좋아했어. 사랑한다고 고백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왜 안 오는 거야. 내 고백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어서 돌아와. 그냥 옆에서 몰래 바라만 봐도 난 행복하니까 제발 돌아와. 그냥 쳐다볼 수 있는 기회라도 줘, 차웅아. 그만 애태우고 어서 돌아와줘. 너의 그 환한 웃음 보고 싶단 말이야. 진작 사랑한다 말할 걸. 진작 좋아한다 고백할 걸. 너무 후회가 돼. 보고 싶어 차웅아"

 

2014 4 22, 안산 고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정차웅군의 발인이 있었다.
정차웅군 유족들은 "한푼의 국민 세금도 헛되이 쓸 수 없다"며 조촐하게 장례를 치른 사실이 알려져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유족들은 장례비용 전액이 국가에서 지원됨에도 장례식장에서 가장 싼 416000원짜리 수의와 27만원짜리 관으로 장례를 치렀다. 정군의 희생정신을 욕되지 않게 하려는 유족들의 사연도 알려져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정군의 아버지 정윤창(47)씨는 둘째 아들 정군에 대해 "딸 같은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큰 아들은 딱딱한 면이 있는데 둘째는 귀여운 짓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② 안산 단원고 선생님, 최혜정

 

최혜정 교사는 단원고 2학년 9반 담임으로 침몰 당시 학생들을 대피시키느라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최 교사는 카카오톡 단체방을 통해걱정하지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께라는 글을 올리고 10여명의 학생을 구출했다.

 

2014 12 9일 동국대(총장 김희옥)는 제자들을 위한 희생정신으로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故 최혜정 씨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추모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또 故 최혜정 씨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배들에게 전하기 위해 사범대 건물 앞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김희옥 총장과 유가족, 역사교육과 후배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유가족은여기에 모인 후배들이 혜정이보다 더 좋은 교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오늘의 감사한 마음을 절대 잊지 않고 살겠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편 동국대 82학번 동창회는 故 최혜정 추모기금 1500만원을 학교에 전달했다. 동국대는 사범대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③ 안산 단원고 선생님, 전소영

 

전소영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2012 2월 단원고에 부임한 새내기 선생님이었다. 1학년 때 가르친 아이들이 2학년이 되면서 이 아이들의 2학년 담임교사를 자청했고, 그렇게 1학년때 가르치던 제자들을 다시 2학년에도 가르치게 되었다. 선생님의 휴대폰 사진에는 학생들의 단체사진과 함께 '2-2반 벚꽃송이들'이란 문구가 있다.

 

 

 

16일 오전 911분 전수영 선생님은 어머니에게엄마 배가 침몰해, 어떡해라고 다급한 문자를 보낸다. 이 문자에 깜짝 놀란 어머니가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고작 12초 밖에 이루어 지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안부를 묻는 어머니께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야 한다는 말과,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이들에게도 연락해야하고 학부형한테도 연락해야하니 얼른 끊자고 말한게 통화 내용의 전부 였다고 한다.

 

고 전수영 선생님은 당시 탈출이 가장 쉬운 5층에 있었지만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동료 고 이지혜 선생님과 함께 4층 객실로 내려갔다. 전 교사는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직전에 조금 남아있는 배터리로 남자 친구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낸다.

'배가 침몰해. 구명조끼 없어. 미안해. 사랑해'

 

마지막 구명조끼까지 아이들에게 다 내어주고 자신은 구명조끼도 챙기지 못하고 배는 완전히 침몰하고 있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다시는 문자도 전화도 없었다. 대답없는 딸을 향해 어머니는 계속 문자를 보엥다.

 

'예쁜 내딸 보고싶어, 엄마가 미안해 사랑해....’

 

 

 

 

 

 안산 단원고 선생님, 남윤철

 

남씨는 국민대 영어영문학과(98학번)를 졸업하고 교원임용시험에 합격, 안산 단원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세월호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늘 솔선수범하는 태도로 존경 받았던 故남윤철(, 35)선생님은 마지막까지 학생들의 탈출을 도왔다. 학생들에게 일일이 구명조끼를 던져 입히고 객실 밖으로 대피시켰다. 이제는 더 이상 탈출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남윤철씨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제자들이 마음에 걸려 다시 아래쪽 객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남 선생님의 모교인 국민대학교는 그가 마지막으로 수업을 들었던 강의실을 '남윤철 강의실'로 명명하기도 하고 남윤철 장학금도 신설했다.

  

 

 

 

 세월호 사무장, 양대홍

 

사무장 양대홍씨는 선장 등 선박직 선원 15명이 승객을 버려두고 먼저 도망간 배에 끝까지 남아 승객들을 구했다. 세월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하자 양 사무장은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 수협 통장에 모아둔 돈이 있으니까 큰아이 등록금으로 써.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해 끊어….” 양 사무장은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아들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전화를 끊은 뒤 먼저 세월호 3층 선원 식당칸으로 갔다. 식당칸에 있던 아르바이트생 송아무개씨가저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어쩔 줄 몰라했다. 양 사무장은빨리 나가야 한다며 송씨를 다독이며 싱크대를 밟고 창문을 열어줬다. 식당칸에는 가스가 새어나오고 이미 사람의 키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지만, 다른 곳으로 승객들을 구하러 갔다. 약 한달 동안 실종된 그는 이날 끝내 주검으로 돌아왔다.

 

 

 

 

 

 세월호 승무원, 박지영

 

세월호 승무원 박지영씨(23)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며 탈출을 도우며, 배에 끝까지 남아 있다가 결국 사망하였다. 생존자인 학생의 인터뷰에 따르면 “배가 기울면서 3층에서 난간을 붙잡고 있었는데, 승무원 누나가 뛰어내리라고 해 바다로 뛰어 내려 목숨을 구했다. 당시 10명이 함께 있었는데 구명조끼가 모자라 승무원 누나가 학생들에게 조끼를 양보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누나는 왜 조끼를 입지 않느냐.”고 묻자 “너희들 다 구하고 나도 따라 나갈게”라고 답하였다고 전했다.

 

 

 

 

 

 

 화물차 기사, 김동수

 

화물 운전기사 김동수(50)은 사고 당시 여객선 3층 화물운송 기사 전용 객실에서 동료 기사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배가 기울자 일반 객실이 몰린 4층으로 이동해 호스와 밧줄을 던져 10여 명의 사람들을 구하고 생환하였다. 특히, 그가 구한 이들 가운데는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이사를 가다가 사고를 당한 어린이 권지연(6, )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10여명의 학생을 구조한파란 바지 아저씨김동수씨(50). ‘의인으로 불리는 그가 2015 3 19일 밤 제주시 조천읍 자택에서 흉기로 자해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다행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딸이 발견했다. 생명에는 이상이 없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다.

화물차 운전기사인 그는지나가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그날이 생각난다. 창문을 봐도 아이들 얼굴이 스친다. 딸 같은 아이들이다. 어떻게 잊으라고 할 수 있나. 주변에서는 다들 고통에서 빠져나온 줄 안다. 절대 아니다라고 밝혔다.

 

 

 

 

 

 배관설비사, 김홍경

 

배관 설비사 김홍경(59)은 제주도에 있는 건축회사에 첫 출근을 하던 중 사고를 겪었다. 그는 배가 기울어지던 30여분 동안 주변 사람들과 함께 소방호스와 커튼을 묶어 선박 1층에 있던 학생 20여 명을 6~7m가량의 위층 난간으로 올려주었고 그 자신을 포함하여 이들은 모두 생환하였다. 그는, 그 사이에 1층에는 물이 가득 차는 바람에 더 많은 학생들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암투병 중인 김홍경씨

 

 

 안산 단원고 학생, 박호진

 

단원고 학생 박호진은 울고 있던 어린 아이를 급히 업고 구명보트에 뛰어올라 둘 다 생환할 수 있었다. 박군은 "나도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모를 찾으며 울고 있는 아이를 두고 먼저 나올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안산 단원고 학생, 조대섭

 

단원고 학생 조대섭은 많은 학생들을 구출해 냈지만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다. 구조헬기가 도착한 뒤에도 남아서 20여명의 학생들을 구했다고 한다. 주변의 여학생들을 일일히 대피시키고 나서야 본인도 구조선에 올랐다.

 

 

 

 

 

 세월호 승무원, 정현선·김기웅

 

정현선씨와 김기웅씨는 4년전부터 사귀어온 사이로 올해 9월의 결혼을 약속하고 각각 승무원과 아르바이트로 세월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정현선씨는 6년전부터 세월호에서 서비스업무를 맡아왔고 김기웅씨는 7년전부터 청해진해운 소속으로 불꽃놀이 이벤트를 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원래 김기웅씨는 세월호가 아닌 오하나마호라는 여객선에서 일을 했지만 예비신부인 정현선씨가 "심심한데 같이 타면 좋겠다"고 권유해서 이번에 세월호에 승선 했다고 한다. 사건당일 많은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구했지만 정작 두분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같은날 세상을 떠난 정현선씨와 김기웅씨..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결혼.. 하늘에서는 꼭 결혼하셔서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기성 세대의 한 명으로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누구도 반성하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너희들의 희생이 의미 없지는 않는 세상이 오길 바라며 ....

 

 

 

종교의 탈을 쓴 사이비종교의 폐해

https://www.youtube.com/watch?v=GKy2DLdtexI&t=2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