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1일

황윤석 판사 변사 사건

산풀내음 2017. 3. 5. 07:31

19614 21,

황윤석 판사 변사 사건

 

1961 4. 4 19혁명 1주년을 맞아 19일과 20일은 전국적으로 각종 이유를 내건 데모 시위가 밤늦게까지 벌어졌다. 이런 소용돌이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 기미가 보이던 21, 라디오에서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판사 황윤석의 의문사였다. 이날 오전 9시경 서울시 중구 신당동 자택 방에 숨져있는 황윤석씨를 시아버지 손병도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우리나라 여판사 1, 황윤석 판사 (黃允石, 1929 ~ 1961 4월 21), 그녀는 192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학가 황의돈의 딸이었던 황윤석은 어려서부터 철학과 문학에 관심이 컸으나,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게 됐다. 1952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이 해 스물 셋 나이로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사법고시)에 합격한 황윤석은 1954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판사가 됐다. 황윤석의 죽음이 신문, 라디오를 통해 떠들썩하게 보도되자 검찰은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담당 검사에 오탁근 부장검사를 배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황윤석 판사는 전날 저녁 감기기운으로 남편과 함께 감기약을 똑같이 두 알씩 먹고 잠에 들었다. 아침에 시어버지 손병도가 의식을 잃은 부부를 발견하고, 부부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남편만 깨어났다. 당시 경찰은 남편은 처음 부인과 함께 병원에 실려 갔을 때 혼수상태를 가장(假裝)했다며 타살이라고 밀어붙였다. 특히 시어머니와 관계가 매우 나빴다는 사실로 타살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황윤석의 시체해부 결과 밝혀진 것은 베나드릴 (Benadryl; 항히스타민 알레르기 치료제)이라는 약물이 검출되었을 뿐이었다. 즉 독살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렇듯 황윤석 판사의 사인이 뚜렷하게 규명되지 않자 항간의 관심도 점차 커져만갔다. 그러나 때마침 5.16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묻혀버리고 말았다.

 

다시 세상의 화제로 떠오른 건 그해 12 12일경. 수사를 재개한 경찰이 황 판사의 남편을 유기치사 혐의로 구속한 뒤였다. 경찰은 평소 남편이 아내를 괴롭혔고 사건 당일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신속히 아내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아 죽음을 방치했다는 이유로 기소한 것이다. 남편은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상고해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동시에 ‘황 판사 변사 사건’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