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7일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동상 제막

산풀내음 2017. 3. 10. 20:54

19684 27,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동상 제막

 

충무공탄신 423주년을 하루 앞둔 1968 4 27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제막됐다. 이날은 충무공 탄신 423주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애국선열 조상(彫像)건립위원회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각계인사가 참석, 선열의 열을 되새겼다.

 

광화문 네거리에 동상이 서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지만 그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각가 김세중 측의 전언)

 

구리로 만든 충무공 동상은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고() 김세중씨가 13개월에 걸쳐 만든 작품으로, 좌대(座臺) 높이 12, 동상 높이가 7m에 달했다. 30평 화강석 좌대에 세워진 동상의 전면양쪽에는 청동주물의 독전고가, 좌대 하충부분에는 청동주물의 길이 3m 되는 거북선이 놓였고 좌대뒷면에는 이은상씨의 명문이 새겨졌다.

 

당초 세종로에 세워지는 동상이니 만큼 세종대왕을 세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제가 훼손한 조선왕조의 축(=정기)을 되살리는 데는 이순신 장군이 최고라는 의견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져 충무공 동상을 세우게 됐다고 한다.

 

충무공 동상 제막식에서 천을 걷어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끝)

 

이순신은 우리 어린이들이 존경하는 인물 1. 그것은 패배와 설움에 북받혀 발버둥친 질곡의 역사가 남긴승리의 상징’, 부당한 권력과 권모술수의 책략을 뿌리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어간올곧음에 바치는 겨레의 찬사이다. 하물며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겨 종살이 생활을 40년 가까이 한 우리에게 그는구국과 항일의 구심점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동상이 처음부터 비판에 직면했었다. 동아일보는 제막 당일 제막기사와 함께 충무공 동상과 거북선의 고증(考證)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충무공 전문가 최석남씨의 기고문을 실었다. 그는 갑옷 문제, 칼 문제, 두 다리를 벌린 자세의 문제 등 관련된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밖에도 최씨는 칼은 독전용이다. 또 동상은 적을 노려보는 모습이지 지휘관으로서 부하에게 위엄을 보이는 모습은 아니다라고 지적했어며 동상의 얼굴 모습은 일단은 논외로 한다고 했다. 그는 거북선에 대하여도 동상에 비해 거북선은 너무 빈약해 마치 무슨 파충류가 발밑을 기어가는 모습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1968 4 27일 동아일보

 

그런데 이 동상은 지난 1977년에 이미 헐리기로 결정된 바 있다. 1977 5 1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잘못 조각돼 헐고 새 동상을 세우기로 문광부와 서울시가 결정했다는 것. 문화재 전문가들은 동상의 고증이 잘못됐다고 여러 차례 지적했고, 이에 서울시가문화공보부 영정심의위원회에 정확성 여부를 심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시민들이성웅의 조상(彫像)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느냐라며 관계 당국을 성토하고 나서자 급기야 서울시는 1979 5월 문공부에 충무공 동상을 다시 만들어 세울 것을 요청해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같은 계획은 1979 ‘10.26사건후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실행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과연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 다시 말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철거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1977 5 10일 동아일보 기사

 

 

1) 이순신 장군은항복하는 장군의 모습이다?

 

그 이유는 이순신 장군이 칼을 오른 손에 들고 있다는 점. 따라서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칼을 뽑을 수 없는 모습이고 이는 항복한 장수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이다. 동상을 조각한 김세중 씨 측은 이에 대해장군이 왼손잡이일 리는 없지요. 왼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콘셉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으로 뭔가를 쥐고 있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고 밝힌 바 있다.

 

 

 

2) 이순신 장군이 들고 있는 칼은일본도’?

 

이순신 장군의 칼이 일본도라는 지적에 대해 김세중 측은현충사의 칼은 일본도가 맞습니다. 197.5㎝나 되는 긴 칼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에 끌려갔던 도장(刀匠) 태구련(태귀련 혹은 태귀운이라는 설도 있다), 이무생이 장군에 잡혔어요. 장군은첩자가 아니냐고 문초한 뒤 칼 두 자루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일본에서 일본도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일본도는 당시로서는 최신예 검()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상의 칼은 현충사 칼을 모델로 했지만 실제 비율보다 축소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현충사에 소장된 보물 제326호 이충무공(李忠武公) 장검은 조선식 쌍수도(雙手刀)에 속하며 무예도보통지에 의해서장검. 용검. 평검이라고도 불리며, 칼날의 길이 5, (동호인 1), 자루 1 5. 7척짜리도 볼 수 있다.” 고 정의되어 있다. 이 칼은 실전용이 아닌 의전용 칼이므로 길이가 1미터 97센티, 칼집에 넣었을 때는 2미터를 넘는 크기이다. 만약 이 칼을 짚었다면 당연히 키보다 높은 칼을 묘사해야지 허리정도까지 오는 칼로 표현될 수 는 없다. 허리에 차는 칼, 혹은 그보다 작은 칼을 묘사하려면 이순신 장군이 패용한 실전용 칼쌍룡검을 묘사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장검의 길이를 축소, 일본도를 만들어 놓고현충사의 칼이 일본도 라는 변명은 받아 들이기 힘들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 들고 있는 장검(長劍)은 보물 제326호 이충무공(李忠武公) 장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길이뿐만 아니라 칼날의 곡률(曲率)을 보더라도 이충무공 장검이 상당히 큰 곡률을 갖는데 반해서 세종로 동상의 장검은 거의 직선에 가까울 정도로 곡률이 작다. 동상의 칼은 일본도 혹은 일본도의 변형일 뿐이다. (<동아일보> 2004.10.9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칼은 일본도참조)

 

광화문 동상의 칼() 및 이순신 장군의 실제 칼 쌍용검의 모습()

 

 

3) 이순신 장군의 갑옷은중국 갑옷’?

 

전통적으로 조선 갑옷은 두루마기처럼 입는 형태-포형(袍形)-여서 어깨부분을 감싸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 반면 중국갑옷은 피박(披膊)형 갑옷으로, 어깨와 가슴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어깨 위로 두르는 일종의망토형방호구 형태다.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중에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세종로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 갑옷은 어깨 부분이 조각으로 덮여 있어 조선식이 아니라 중국식 갑옷임이 명백하다. 이와 관련해 김세중 씨 측은갑옷의 모양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장군 영정을 참조했고 복식 전문가인 석주선 씨의 고증도 얻은 것이라고 변명한 바 있다.

 

조선의 갑옷()와 이순신 장군 동상 갑옷()

 

 

4) 이순신 장군의 얼굴은 왜표준영정과 다른가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얼굴을 놓고도 말이 많다. 특히 현충사에 걸려있는 국기 지정이순신 장군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김세중 측의 입장을 정리하면, 현충사의 이순신 장군 초상이표준영정이 된 것은 동상이 제작된 지 5년 후인 1973년의 일이므로 참조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김세중 씨는 동상을 만들면서 당시 존재했던 이순신 장군의 영정 가운데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각가인 김세중 얼굴과 비슷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충무공 표준 영정

광화문 동상()와 조각가 고 김세중()

 

 

5)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은 왜 누워 있는가

 

이는 전장을 독려하고 군사를 호령하여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용맹한 이순신의 이미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군의 탄환을 맞은 뒤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한 뒤 조카 이완에게계속해서 북을 쳐라며 전쟁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승당에 걸린노량해전도는 이런 역사적 전거에 입각해 북 옆에 쓰러진 이순신 장군을 묘사했다. 물론 북은 똑바로 서서 언제라도 장군을 맞을 태세로 그려졌다. 그러나 광화문 동상 앞 좌우의 북은 모두 뉘어 있어불패의 장군으로서 지휘하는 모습을 형상화 하지 못했다. ‘최악의 실수라 할만 하다.

 

동상 앞면 좌우에 누워 있는 독전고(督戰鼓 : 전투를 독려하는 북)

노량해전도에 나타나 있는 독전고

 

이것 외에도 또 문제가 있다. 바로 동상의 부실 제작 문제이다.

명작은 오랜 기간을 두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광장 가운데 있는 부르델 (Antoine Bourdelle, 1861 ~ 1929)알베아르 장군 기념비(1926년 건립)’는 제작기간이 10년 이나 걸렸고, 로댕 (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 - 1917)발자크상 6년에 걸쳐 제작되었다. 그런데 김세중씨의 충무공 동상은 고작 13개월 만에 마쳤다. 그러다 보니 고증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이신 혜문스님께서 충무공 동상의 문제점을 거론하자 동상 제작자인 김세중씨의 아들이 스님에게 해명을 겸한 메일을 한 통 보냈다. 그에 따르면 경비 문제로 폐선의 엔진, 탄피, 고철 덩어리 등을 녹여 동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그 결과 동상의 재질과 두께가 고르지 못하고 색상 또한 균일하지 않아 청동 고유의 색을 내지 못했다. 그래서 옛날 동상 같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청록색 페인트와 동분(銅粉)을 섞어 표면을 칠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