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서 일왕 생일 경축식에 투탄

산풀내음 2017. 3. 11. 17:01

19324 29,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서 일왕 생일 경축식에 투탄

 

윤봉길은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1931) 이후 악화된 한중 양 민족 간의 문제 해결과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임정이 조직한 비밀조직 '한인애국단'의 단원이었다. 백범이 책임을 맡은 이 조직은 극비 결사체였다. 당시 한인애국단은 입단식을 태극기 앞에서 입단 선언문을 목에 걸고 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는데,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대표적인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1932 1 8,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말이 다치고 마차가 부서졌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런 와중에 상하이 사변이 그해 1 28일에 일어났고, 결국 전황이 불리해진 장제스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상하이에서 중국군의 비무장화에 합의한다. 이 승리에 고무된 일본군은 1932 4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갖기로 했다.

 

매헌(梅軒) 윤봉길은 1930년에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丈夫出家 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건너온 충남 덕산 출신의 우국청년이었다. 그는 이봉창 의거의 실패 이후 백범을 찾아 '동경사건(이봉창 의거)과 같은 경륜을 지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백범은 전장절 및 상하이 전승 기념 행사 개최 사실을 확인하고 윤봉길을 불러 부탁한다. 윤봉길은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시계를 끌러 백범에게 주고 백범이 마련해 준 폭탄 두개를 갈무리하고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윤봉길은 1932 4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했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고 일본인들만 남아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이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11 50,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이 던진 물통 폭탄이 단상에서 폭발했다. 폭탄 명중을 확인하고 자결용 도시락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불발하면서 그는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다.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이 죽었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실명, 9사단장 우에다 중장과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다리를 잃었다.

 

의거 현장에서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 이 사진은 조작된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거사 후 윤봉길은 무차별 구타 당해 쓰러졌다고 한다. 매헌 전시 사진.

 

거사직후 체포된 윤의사는 525일 상해 파견 군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1 18일 일본 오사카의 한 형무소로 옮겨졌고 12 18일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이튿날 총상형에 처해져 순국했다.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헌이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지도 없이 매장되었다. 일제는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 없이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그것은 일본군 수뇌부에 타격을 입힌 윤봉길에 대한 일제 군부의 치졸한 복수였던 셈이다.

 

만보산 사건과 상하이 사변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국 주석 장제스는 상하이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이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는 이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어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큰 도움을 주었고 광복군 창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며 의거에 비판적이었던 이승만도 뒷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였다.

 

상하이 의거 이후 마오쩌둥(毛澤東)도 임정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를 거쳐 충칭까지 임정이 청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저우언라이(周恩來)를 통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0년 충칭에서 열린 광복군 창립대회에 중국 공산당을 대표한 저우언라이와 둥비우(董必武)가 참석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백범은 자신이 사지로 보낸 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을 잊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의 순국 13년 뒤에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1945 11, 임정 주석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던 백범은 이듬해 두 의사와 함께 백정기(1896~1934) 의사의 유해를 일본으로부터 송환한다. 3의사의 유해가 송환되자 1946 7 7, 이들의 장례식이 5만여 군중이 참례한 가운데 해방 후 첫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3의사는 문효세자의 묘소가 있던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효창원 3의사 묘역에는 아직도 유해를 모셔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허묘 오른쪽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소가 나란하다.

 

조국으로 봉환되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 일본 가나자와역(1946. 3. 8.) 경교장 전시사진

3의사의 유골 봉환(1946. 6). 맨 오른쪽에 선 이가 백범 김구다. 경교장 전시 사진.

효창원의 3의사 묘역. 맨 왼쪽은 안중근 의사의 허묘. 동쪽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가 나란하다. 기단에 '유방백세' 글자 일부가 보인다.

 

2015 429일 중국 상하이시 훙커우구 루쉰 공원 매헌기념관 광장에서 한국과 중국 정부 대표단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봉길 의사 의거 8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윤 의사가 조국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낭독됐다.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2015년 매헌기념관이 6개월의 보수를 거쳐 새로 문을 열었다. 매헌은 윤 의사의 아호(雅號). 1994년 중국 정부가 65( 20) 남짓한 부지를 제공해 설립된 매헌기념관은 그간 전시물이 낡고 자료가 부족해 윤 의사의 정신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보훈처는 훙커우구 측과 협력해 작년 말부터 15000만원을 들여 개·보수에 나섰다. 공원 입구부터윤봉길 기념관이란 한국어 안내판을 걸고, 윤 의사의 업적과 일대기를 다룬 영상물과 옥외 전시물을 제작했다. 중국 정부 역시 기념관 주변 부지를 2500평까지 늘려주었다. 양국 정부가 직접 나서 기념식을 가진 것은 처음이다.

 

보훈처 관계자는루쉰 공원은 중국의 문호인 루쉰의 묘역이 있는 곳이어서 중국인들에겐 매우 중요한 장소라며중국 정부는 윤 의사의 정확한 폭탄 투하 위치에 대한 연구를 허용할 만큼 우호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윤 의사의 친손녀인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은상하이 의거는 단순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비도덕적 제국주의에 항거한 점에서 세계적 평화 연대 운동의 출발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까오샹 상해 홍구구부구청장이 29일 오전 중국 상해 홍커우구 루쉰공원 내 매헌기념관 앞에서 열린 제83주년 윤봉길의사 의거 기념식 및 상해 매헌기념관 재개관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2015. 4. 29.

재개관한 매헌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