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29일

LA 흑인폭동으로 58명 사망, 2천383명 부상

산풀내음 2017. 3. 11. 17:10

19924 29,

LA 흑인폭동으로 58명 사망, 2383명 부상

 

1992 4 29일부터 미국 LA지역을 무법천지로 몰아넣은 흑인폭동(1992 LA Riots)은 미국 사회의 암적 요소인 인종간 불평등과 상호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폭동의 발단은 일명 '로드니 킹(Rodney Glen King, 1965-2012) 사건'에서 출발한다. 1991 3 3 LA 경찰국 소속의 백인 경찰관 4명이 과속으로 달리던 흰색 차를 추격전 끝에 세우고 범인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경찰은 운전자인 로드니 킹을 끌어냈지만, 그는 경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난폭하게 행동하고 경찰은 이에 폭력으로 대응한다. 피투성이가 된 킹은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는데, 이 장면을 인근 주민들이 비디오로 찍어 방송사에 제보를 하게 된다. 다음 날 이 테이프는 그대로 뉴스에 방영되었지만 이 테이프는 81초에서 65초로 편집된 테이프였고, 이 테이프에는 로드니 킹이 경찰에게 위협적으로 저항하는 장면이 편집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로드니 킹 사건은 언론이 조작한 것이었다. 3 15일에 킹을 구타한 경찰관 4명은 법원에 기소되었다. 7 9일에는 경찰 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해가 넘어가 1992 2 5일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동안 진행된 법정 심의 결과, 4 29일에 발표된 판결은 4명의 경찰관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사 결정. 당연히 이런 판결에 분노한 LA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판결이 발표된 그 날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시위는 점점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불이 나며 상점들은 털리고 박살났으며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흑인들은 곳곳에서 지나가는 백인을 차에서 끌어내려 집단 구타를 하고 차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첫 피해자는 레지널드 데니라는 평범한 백인이었다. 데니는 물건 배달 도중 영문도 모른 채 흑인들로부터 무자비하게 몰매를 맞았다. 마침 이 장면은 헬리콥터에 타고 있던 기자들의 생중계로 수백만 시민들이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데니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이 일은 4·29 흑인 폭동의 심각함을 적나라하게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미 역사상 전대미문의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은 이틀하고 14시간이 흐른 5 2일 토요일 오전 8시가 돼서야 6,000 명의 주 방위군이 투입돼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58명이 사망하고, 2,383명이 병원에 실려갔으며, 12,111명이 경찰에 구속됐다. 크고 작은 방화만도 7,000건에 달했다.

 



 

LA 폭동은 근본적으로 백인 주류사회에 대한 증오의 폭발이었다. 인구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열악한 생활여건에 시달려왔다. 흑인 가구당 수입은 미국 평균치의 60%밖에 안되고, 실업률은 2배를 넘었다. 25년 동안 공화당 행정부 아래 지속된가진 자만을 위한 보수적 인종정책이 갈등을 부채질했다. 그런데 그 직접적인 피해는 LA거주 한인들이었다.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수많은 한인 타운이 있었다. 당시 흑인폭동에서 제일 문제시되었던 것은 경찰이 흑인폭동을 막으면서 백인거주지역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블럭했었고 한인지역으로 가는길은 그대로 열어 놔 흑인들이 한인 지역으로도 몰려가도록 만든것이였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당시 강력히 항의하여 한미간의 외교관계가 나빠지기도 했었다.

 

주 방위군이 출동하고도 북쪽으로 가는 흑인들을 제 때 차단하지 못했기에 피해는 심각했다. 다만 흑인들에 대한 한인들의 편견과 차별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미국의 흑인 래퍼들은 폭동이 일어나기 전 한인들에 대한 불만을 곡으로 써서 비난하기도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폭동이 터지자 미국 언론들은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두순자 사건을 폭동과 연관지어 집중 보도,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백인과의 감정에서 폭발한 흑인 폭동이 한인사회에 치명타를 입히게 된 원인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민의 역사를 살펴 보아야 한다. 1965년 이전까지 미국에 공식적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유럽인들뿐이었다. 이런 유럽 편향적인 이민 정책이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그릇된 정책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나온 이들이 흑인 지도자들이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흑인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대화하는 자리에서 킹 목사가 불평등한 미국의 관문을 지적하자 케네디 대통령도 이에 동감하고 과감한 이민법 개정을 명하였다.

 

한인 이민 초창기의 인구 분포를 보면 주로 의사, 간호사, 교수 등의 인텔리 계층의 이주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실제 한인 교포 사회가 형성된 시기는 가족 초청이민이 본격화된 1970년대 초반일 것이다.

 

초기 이민 연구에 나타나듯 1965 2139명이 미국에 이민을 온 것으로 시작으로 1969년까지 약 12천명의 공식 이민이 미국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있다. 이민 숫자는 1971년을 기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1976 383명으로 늘었다.

 

한국에서 갓 도착한 이민들의 경우 언어 장해도 문제거니와 소위 신용사회인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일은 하늘에서 별을 따기와도 같다.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남들 하는 대로 은행 문을 두드릴 수 없다. 크레딧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에서 어렵게 마련해온 비상금과 친인척의 주선으로 가입한 계를 통해 마련한 돈으로 권리금과 시작 비용을 조달해야한다. 결과적으로 싼 가게, 싼 업종을 두드리게 되어있다.

 

그런데 권리금이 싼 지역은 우범지대이기 일쑤이다. 인종을 막론하고 누구든 어느 정도 재산을 축적하고 나면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못사는 계층이 몰려있는 곳 소위 게토(ghetto)에는 빈민만 존재하며 상인들은 빠른 속도로 물갈이를 한다. 할렘, 베드포드 스타이브슨, 이스트 뉴욕 등이 대표적인 게토이며 또한 우범지역이다. 바로 이들 지역에서 지난 30여 년 간 뿌리를 내린 이들이 우리 한국이민들이다. 이들 지역의 주민들의 대다수는 흑인이거나 히스패닉 (스페니시)들이다. 그것도 보통 유색인종 집단이 아니다. 미국의 학계에서는 이들을 Underclass라 부른다 (Wilson, 1979).

 

자연스럽게 한인과 흑인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기고 이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그 중 대표적인 한 사건이 1991년에 발생한 두순자 사건이다.

1991 10대 라타샤 할린스(Latasha Harlins)라는 흑인소녀와 슈퍼마켓 주인 두순자 사이에서 2달러짜리 오렌지 주스 때문에 몸싸움까지 일어났다. 라타샤 할린스는 오렌지 쥬스를 가방에 넣고 돈을 꺼내려 했는데 두순자는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쥬스를 훔치려는 줄 알고 라타샤 할린스의 스웨터와 가방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에 격분한 라타샤 할린스는 두순자에게 폭행을 가했고, 두순자는 판매대 아래에 뒀던 권총을 꺼내 라타샤 할린스의 후두부에 쏘았다. 총소리를 들은 남편이 아내의 설명을 듣고 경찰에 신고하였고 두순자는 자신의 생명이 위협 받았다며 정당방위를 호소했으나 CCTV에 잡힌 장면은 이미 뒤돌아서 무방비 상태의 라타샤 할린스를 뒤에서 쏘는 모습뿐이었고 검사는 일반살인죄로 16년 형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유죄만 인정한 뒤 직업적 범죄(Career Criminal)가 아닌 충동 살해죄로 처벌했고, 5년의 보호감찰과 400시간의 사회봉사 판결을 내렸다. 흑인 사회에서는 분노했고, 흑인의 목숨은 2달러 밖에 안되냐는 반응들이 대다수였다. 만약 라타샤 할린스가 백인이었더라면 형량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Family Gathers on 25 Year Anniversary of Latasha Harlins' Death

 

사건 당시 미국 경찰은 비버리 힐즈와 헐리우드등 부촌만 지켰다. 그리고 폭행 살인등의 심각한 생태였던 한인 상점이 몰려 있는 지역은 방관했다. 때문에 한국계 이민자들은 상점을 지키기 위해서 진지를 구축하고 흑인들의 폭력에 대응했다. 이는 미국 현지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출동한 것을 계기로 4.29 흑인폭동는 서서히 진압되었다. 그 뒤 한인 교민 사회와 흑인 사회에서 발생한 각종 재난에 서로 도와줌으로서 관계는 서서히 개선되어갔다. 한흑 갈등의 와중에서도 한국인 출신 입양 아들을 보호한 한 흑인 남성의 기사가 언론으로 보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직접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한인사회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최종적으로 집계된 한인사회의 피해는 최소 3 5천만 달러의 손해, 2300여개의 점포손실, 그리고 가게 주인만 다섯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로드니 킹 사건과 관련하여서는 판결 이후 흑인 교회들이 중심이 돼 모금운동을 펼치고 서명운동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은 경찰들에 대한 재심 항고소송이 열렸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93 4 17일 포엘과 스테이시 쿤 두 백인 경찰은 유죄판결을 받았고, 로스앤젤레스시는 로드니 킹에게 380만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했다. 폭동이 발생한 로스앤젤레스 지역에는 150억달러의 연방정부 투자가 이뤄졌다.

 

1992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일어난 흑인폭동이 진압된 직후 LA에 사는 한인 교포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화합을 다짐하는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