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5월/5월 8일

코카콜라 시판

산풀내음 2017. 3. 22. 20:15

1886 5 8,

코카콜라 시판

 

미국의 남북전쟁이 종결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애틀랜타 시는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보아도 좋았다. 부상자들은 기력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존 펨버턴(John Pemberton)도 그들 중 하나였다. 1865 4, 소속되어 있던 기병대가 패하면서 그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부터 존 펨버턴은 만성 통증에 시달렸다. 식물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 참전용사는 효과적인 약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이왕이면 통증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맛도 좋은 음료를 만들 작정이었다.

 


 

쉰네 살이 되던 1885, 펨버턴은 프렌치와인코카로 특허를 받았다. 자양강장제인 프렌치와인코카는 코르시카 출신 프랑스인 앙젤로 마리아니가 만든 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펨버턴은 마리아니의 제조법을 약간 수정해 의학적 효과가 있는 콜라 열매를 첨가했다이 음료는 많은 장점이 있었다. 신경을 약간 흥분시켜서 원기를 돋우고 두통을 없애주었다.

 

같은 시기에 애틀랜타에서는 알코올 문제로 금주법이 제정되었다애틀랜타의 모든 약국에서 판매되고 있던 프렌치와인코카에는 약간의 알코올 성분이 들어가 있었다펨버턴의 대표적인 프렌치와인코카가 하루아침에 금지약품이 된 것이다.

 

펨버턴은 알코올 성분이 없는 프렌치와인코카를 개발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연구의 핵심은 코카 잎과 콜라 열매, 카페인 등 의학적 효과가 있는 각종 에센스를 함유하되 알코올 성분은 제거해야 했다코카 잎과 콜라 열매의 쓴맛을 감춰주던 알코올 대신 사탕수수를 첨가했다펨버턴의 새로운 조제법, 즉 코카콜라의 제조법은 오늘날까지도 비밀에 붙여지고 있다.

 

처음에 이 음료는 맹물에 희석해서 팔았다고 한다그러던 어느 날 실수로 인해 순전히 부주의로, 이 음료를 탄산수에 희석했는데 그 덕분에 코카콜라가 지금과 같은 전설적인 음료가 되었다는 것이다.

 

1886 5 8일 토요일, 펨버턴은 코카 잎과 콜라 열매를 주원료로 한 자신의 첫 생산품을 삼발구리단지에 넣어 자랑스럽게 제이콥스 약국에 진열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물 코카콜라의 탄생이었다. 5 29일자 '애틀랜타 저널'에는 코카콜라의 첫 광고가 실렸다. "코카콜라 맛있다! 상쾌하다! 활기를 준다! 기운을 북돋운다!"는 문구였다. 이후 펼쳐진 코카콜라 마케팅의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코카콜라는 옥외광고의 원조이기도 하다.

 

초창기 광고 (캔들러 인수 전)

 

당시 코카콜라 한 잔 가격은 5센트였다코카콜라는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처음 콜라를 맛본 사람들은 계속 즐겨 마시게 되었다코카콜라는 자연히 술을 팔지 않는 카페나 바에서 잘 팔렸고, 대개의 경우 그런 카페나 바는 약국에서 운영했다코카콜라는 갈증을 해소해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폐병에도 효과가 있다는 소문까지 났다.

 

이 새로운 음료에 이름을 붙여준 것은 펨버턴의 협력자이자 회계사였던 프랭크 로빈슨이었다그는 광고를 담당했고, ‘코카콜라라는 브랜드는 그 덕분에 생겨났다그가 단지 주요 성분의 이름을 연결해 상표명을 만들었다여기에 펨버턴이 두 개의 ‘C’를 강조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그는 손수 공들인 글씨로 종이에 ‘Coca-Cola’라고 썼다그때부터 지금까지 시대를 초월한 독창적인 로고는 한번도 바뀌지 않은 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상표가 되었다.

 

 

펨버턴은 자신의 발명이 얼마나 큰 여파를 몰고 올지 결코 깨닫지 못했다불행하게도 그는 주어진 기회조차 잘 활용하지 못했다. 1887년에 금주법이 폐지되자 펨버턴은 아들에게 코카콜라 생산을 맡기고 다시 프렌치와인코카 생산을 재개했다이는 자신이 발명한 20세기 미국 문화의 일면이 되리라고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이었다.

 

쉰여섯 살의 펨버턴이 건강 문제로 회사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초창기 동업자 중 한 사람인 아사 G, 캔들러를 사장으로 앉혔다펨버턴은 이미 중병에 걸려 있었고 목숨을 갉아먹는 암과 오랫동안 싸울 수 없으리라고 예감했다그래서 자신의 지분을 넘기기로 결심했다.  1887년부터 1888 3월 사이에 그는 자기 소유의 약국에서 파는 매상 전체와 코카콜라 1갤런당 5센트의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코카콜라 브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넘겼다.

 

즉 시골 약국의 음료수였던 코카콜라를 본격적으로 상품화한 사람은 캔들러(Asa Candler)였다. 펨버튼이 죽자 18892,300달러에 일체의 권리를 사들인 캔들러는 오늘의 코카콜라를 만든 장본인이다.

 


 

코카콜라는 1900년대까지도 청량음료와 약품 사이에서 정체성의 줄타기를 하는데 실제로 초기 지역신문에 난 코카콜라(Coca-Cola)의 광고를 보면 ‘두뇌 강장제(Brain Tonic)이며 지적인 탄산수 매장음료’라 했다.

 

1889년 ‘코카콜라사’를 인수하여 새로 주인이 된 아사 캔들러 (Asa Candler) 또한 코카콜라(Coca-Cola)의 정체성에 대하여 두통과 위장장애까지 해소할 수 있는 의약품으로서 미국인들의 피로회복과 건강을 책임지는 음료라는 이중적 성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1890년대 약사들에게 발송된 안내 책자에 보면 코카콜라(Coca-Cola)가 두통뿐만 아니라 피로 불면증 신경통까지 낫게 할 수 있다는 설명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1897년 한 신문광고에는 코카콜라(Coca-Cola)는 두통을 낫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과도한 정신적 혹은 육체적 노동으로 인해 지친 심신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건강음료(The Health Drink)로 소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미 의회가 모든 약품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하자 조지아주 세무 당국이 코카콜라(Coca-Cola)를 약품으로 분류해서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 벌어진다. ‘코카콜라사’는 코카콜라(Coca-Cola)가 약품이 아닌 음료라고 주장하면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902년 승소했다.

 

이제 코카콜라(Coca-Cola)는 법적으로 약품이 아니라 완전 음료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승소한 후에도 ‘코카콜라사’는 1910년대 초까지도 계속해서 갈증해소와 동시에 피로회복을 강조했다. 두통을 치유하고 빠른 피로회복을 보장하는 강장제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애매한 태도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1906년 발효된 ‘순정식약품법’(Pure Food and Drug Act)에 따라 1909년 순정 식품국 요원이 코카콜라(Coca-Cola) 원액을 압수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1911년 시작해 1918년 끝난 연방정부 대 코카콜라의 재판) 코카콜라(Coca-Cola)는 점차 의약품이기를 포기하고 '목마름'이라는 보편 정서에 호소하는 청량음료로 리포지셔닝(Repositioning)하게 된다.

 



 

한편 캔들러는 인수 후 시럽 개선 실험에 착수해 '7X'라는 첨가물을 만들어냈다. 7X는 지금까지도 제조방법을 비밀에 붙이고 있는 첨가물이다. 처음에는 주연료였던 코카 잎도 1903년 이후로는 넣지 않았다. 독특한 곡선미로 여체를 연상시키는 코카콜라 컨투어(등고선)병(Contour Bottle)은 1915년에 디자인됐다. 당시 백과사전에 수록된 코코넛의 일러스트에서 힌트를 얻어 밋밋하고 직선적이던 병에 세로 선을 넣어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졌다하지만 이 초기의 병은 생산 벨트에서 자주 넘어져 대량생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따라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한 손으로 잡기 쉽도록 볼록한 부분은 좀 줄이고 아래 부분을 더 오목하게 만들어 오늘날의 콜라 병이 완성되었다.

 

오늘날의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이미지도 코카콜라가 만들어낸 것이다. 음료수 비수기인 겨울철만 되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코카콜라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창조한 광고모델이 바로 빨간 옷의 뚱뚱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였다. 그전까지 산타는 굴뚝을 드나들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요정처럼 묘사됐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단어로 'OK!'에 이어 '코카콜라' 2위에 랭크 됐다고 한다.

 





'역사속에 오늘, 5월 > 5월 8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O, 천연두 완전 퇴치 선언  (0) 2017.03.22